동양철학2015. 6. 12. 02:59

출처: 정민교수님의 '옛사람 내면풍경' (http://jungmin.hanyang.ac.kr/)

까마귀의 날갯빛

菱洋詩集序 


통달한 사람은 괴이한 바가 없지만 속인은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고 보니 괴이한 것도 많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통달한 사람이라 해서 어찌 사물마다 눈으로 직접 보았겠는가? 
하나를 들으면 눈 앞에 열 가지가 떠오르고, 열을 보면 마음에서 백 가지가 베풀어져, 천 가지 괴이함과 만 가지 기이함이 도로 사물에 부쳐져서 자기와는 간여함이 없다. 때문에 마음은 한가로와 여유가 있고 응수함이 다함이 없다. 
그러나 본 바가 적은 자는 백로를 가지고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가지고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사물은 절로 괴이할 것이 없건만 자기가 공연히 화를 내고, 한 가지만 같지 않아도 온통 만물을 의심한다. 
達士無所怪, 俗人多所疑. 所謂少所見而多所怪也. 夫豈達士者, 逐物而目覩哉. 聞一則形十於目, 見十則設百於心, 千怪萬奇, 還寄於物, 而己無與焉. 故心閒有餘, 應酬無窮. 所見少者, 以鷺嗤烏, 以鳧危鶴. 物自無怪, 己迺生嗔, 一事不同, 都誣萬物.

아! 저 까마귀를 보면 깃털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그러나 홀연 유금乳金 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석록石綠 빛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하더니 비췻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또한 괜찮을 것이다. 저가 본디 정해진 빛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어찌 그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리오.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 버린다. 
噫! 瞻彼烏矣, 莫黑其羽. 忽暈乳金, 復耀石綠, 日映之而騰紫, 目閃閃而轉翠. 然則吾雖謂之蒼烏, 可也, 復謂之赤烏, 亦可也. 彼旣本無定色, 而我乃以目先定. 奚特定於其目? 不覩而先定於其心. 

아! 까마귀를 검은 빛에 가두었으면 충분한데도, 다시금 까마귀를 천하의 온갖 빛깔에다가 가두었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검다. 그러나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르고 붉은 것이 그 빛깔[色] 가운데 깃든 빛[光]인 줄을 알겠는가? 검은 것[黑]을 일러 어둡다[闇]고 하는 자는 단지 까마귀를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아니라 검은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물은 검기[玄] 때문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칠[漆]은 검은[黑] 까닭에 능히 거울이 될 수가 있다. 이런 까닭에 빛깔 있는 것 치고 빛이 있지 않는 것이 없고, 형상[形] 있는 것에 태態가 없는 것은 없다. 
噫! 錮烏於黑足矣, 迺復以烏錮天下之衆色. 烏果黑矣, 誰復知所謂蒼赤乃色中之光耶? 謂黑爲闇者, 非但不識烏, 竝黑而不知也. 何則? 水玄故能照, 漆黑故能鑑. 是故有色者莫不有光, 有形者莫不有態. 

미인을 보면 시를 알 수가 있다. 그녀가 고개를 숙임은 부끄러운 것이다. 턱을 괸 것은 한스러움을 나타낸다. 홀로 서 있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눈썹을 찌푸림은 근심스러운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림이 있을 때에는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바라는 바가 있을 때는 파초 아래 서 있는 모습으로 보여준다. 
만약 그 서 있는 모습이 재계齋戒한 것 같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빚어놓은 것 같지 않다고 나무란다면, 이것은 양귀비가 이빨이 아파 찌푸림을 나무라는 격이요, 번희樊姬가 쪽진 머리를 감싸 쥠을 못하게 하는 격이며,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의 아름다움을 야단하고, 손뼉치며 추는 춤의 경쾌하고 빠름을 꾸짖는 격이라 하겠다. 
觀乎美人, 可以知詩矣. 彼低頭, 見其羞也; 支頤, 見其恨也; 獨立, 見其思也; 顰眉, 見其愁也; 有所待也, 見其立欄干下; 有所望也, 見其立芭蕉下. 若責其立不如齋, 坐不如塑, 則是罵楊妃之病齒, 而禁樊姬之擁髻也, 譏蓮步之妖妙, 而叱掌舞之輕儇也. 

내 조카 종선宗善은 자가 계지繼之인데 시에 능하다. 한가지 법도에만 얽매이지 아니하여 온갖 체를 두루 갖추었으니, 우뚝히 동방의 대가가 된다. 성당盛唐의 시인가 싶어 보면 어느새 한위漢魏의 시가 되고 또 송명宋明의 시가 된다. 겨우 송명인가 싶어 보면 다시금 성당으로 돌아가 있다. 
아아! 세상 사람들이 까마귀를 비웃고 학을 위태롭게 여김이 또한 너무 심하도다. 그러나 계지의 동산에는 까마귀가 자줏빛도 되었다가 비췻빛도 된다. 세상 사람들은 미인을 재계한 듯 빚어놓은 듯 만들고 싶어하지만 손뼉치며 추는 춤과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는 날로 경쾌해지고 더 아름다워 질 터이고, 틀어올린 머리와 아픈 이빨은 모두 나름대로의 태가 있는 법이다. 그 성내고 노함이 날로 심해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구나. 
세상에는 통달한 선비는 적고 속인만 많다. 그럴진대 침묵하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으나, 그런데도 말을 그만 둘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일까? 아! 연암노인은 연상각烟湘閣에서 쓰노라. 
余侄宗善字繼之, 工於詩, 不纏一法, 百體俱該, 蔚然爲東方大家. 視爲盛唐, 則忽焉漢魏, 而忽焉宋明. 纔謂宋明, 復有盛唐. 嗚呼! 世人之嗤烏危鶴, 亦已甚矣. 而繼之之園, 烏忽紫忽翠. 世人之欲齋塑美人, 而掌舞蓮步, 日益輕妙, 擁髻病齒, 俱各有態. 無惑乎其嗔怒之日滋也. 世之達士少而俗人衆, 則黙而不言, 可也. 然言之不休, 何也? 噫! 燕岩老人書于烟湘閣.


달사達士와 속인의 차이를 어디에서 찾을까? 처음 보는 어떤 물건이나 경험해보지 않았던 어떤 일을 그 앞에 두어 보면 금세 구별할 수가 있다. 달사는 이미 익숙히 알았던 일이기라도 한듯이 침착하게 당황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속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들은 도대체 자기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을 받아들일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처음 보기는 둘다 마찬가진데 한쪽은 속수무책으로 당황하여 화를 내고, 다른 한쪽은 태연자약 능수능란하게 처리해 버린다. 왜 그럴까? 
달사란 어떤 사람인가?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를 들으면 이미 그의 눈 앞에는 그와 관련된 열 가지 형상이 떠오른다. 그가 들은 것은 하나인데 그는 벌써 열 가지를 알아버린다. 열을 보면 마음 속에서는 이미 백 가지 일이 펼쳐진다. 세상의 그 많은 신기하고 괴이하고 알 수 없는 일들도 그의 귀와 눈을 거쳐가면 어느새 평범하고 익숙한 사물로 변해 버린다. 그는 자신의 이목만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사물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한다. 그의 귀와 눈, 그의 마음은 단지 이 사물과 저 사물을 연결지워주는 매개자의 역할만을 기쁘게 감당한다. 그러기에 어떤 난처한 상황도 그는 당황스럽지가 않고, 어떤 복잡한 문제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 그런 그를 나는 달사, 즉 통달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속인은 그렇지가 않다. 그는 자기가 아는 세계를 통해서만 창밖의 세계를 이해하려든다. 그는 사물로써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아我의 집착을 우선하여 사물을 재려든다. 백로의 고결을 높이 치다 보니 까마귀의 더러움을 비웃는다. 오리의 짧은 다리만 보다가 학의 긴 다리를 보면 위태롭기 그지 없다. 그들은 학의 긴 다리를 오리처럼 짧게 해야만 마음이 놓인다. 검은 까마귀의 깃털을 백로의 그것처럼 만들어 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새울세라
청강淸江에 조히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검은 까마귀가 무슨 잘못이 있던가? 외다리로 고고히 서 있는 해오라비, 그 청순한 고결을 사람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정작 그는 지금 주린 제 뱃속을 채우려고 물 속의 고기를 한껏 노리고 있는 중이다. 까마귀의 반포지은反哺之恩은 어떨까? 늙은 제 어미를 위해 먹이를 토해내는 그 갸륵한 마음도 같이 욕을 해야할까? 까마귀는 검은 날갯빛을 하고도 제 삶을 불편함 없이 잘 살아간다. 그것을 보고 불편한 것은 정작 까마귀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것을 보고 행복한 것은 사실 해오라비가 아니라 사람이다. 왜 까마귀를 더럽다 하는가? 해오라비가 고고할 것은 또 무엇인가? 왜 내가 알고 있는 사실, 내가 믿고 있는 가치만을 고집하는가? 왜 그것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욕하는가? 
까마귀의 날갯빛은 정말 검을까? 아니 그보다 검은 것은 정말 나쁜 것일까? 가만히 보면 까마귀의 날개 속에는 갖가지의 빛깔이 감춰져 있다. 유금빛으로 무리지다가 석록빛으로 반짝이고, 햇빛 속에서는 자줏빛도 떠오른다. 자세히 보면 비췻빛도 있구나. 우리가 검다고만 믿어온 그 깃털 속에 이렇듯 다양한 빛깔이 들어 있었구나. 비췻빛 까마귀였다면 우리가 그렇게 미워했을까? 푸른 까마귀라면 그렇게 경멸했을까? 햇살의 프리즘에 따라 바뀌는 까마귀의 날갯빛을 우리는 거부하고 있었구나. 까마귀는 검다. 까마귀는 검다. 검은 것은 더럽다. 더러운 것은 지저분하다. 지저분한 것은 음험하다. 까마귀는 지저분하다. 까마귀는 음험하다. 가까이 가면 물드니 백로야 가지마라. 
한 스킨 스쿠버가 깊은 바다에서 작살로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 피가 초록빛이었다. 하도 신기해 자랑하려고 서둘러 물 위로 올라오니 그저 보통의 붉은 피였다. 햇빛의 장난에 깜빡 속은 것이리라. 물고기의 피는 붉은 색인가? 아니면 초록색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는 언제나 불변인가? 변화하는 것은 진리가 아닌가? 피는 붉다. 까마귀는 더럽다. 속인은 모든 판단을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러기에 깊은 바다 속에서 초록색으로 보이는 피의 빛깔이 신기하고, 검은 빛 속에 언뜻언뜻 떠오르는 석록빛을 인정할 수가 없다. 까마귀는 저대로 자유로운데 공연히 제가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른다. 온 세상 사람들을 해오라비로 만들어야만 제 사명이 다할 줄로 생각한다. 그래서 남을 못살게 굴고, 비난하고 강요한다. 
그리고 나서 연암은 비로소 본론을 꺼낸다. 그가 제기하는 문제는 색色과 광光, 형形과 태態의 관계이다. 색깔 속에는 스펙트럼이 빚어내는 다양한 광채가 있다. 하나의 꼴 속에는 수없이 많은 태가 깃들어 있다. 속인과 달사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속인은 색과 형만 가지고 사물을 판단한다. 그러나 달사는 그 속에 깃든 광과 태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이편에서 괴이쩍은 일이 저쪽에서는 당연한 것이 되고, 이편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저쪽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일로 된다. 
검다는 것만 가지고 다시 살펴 보자. 검은 색에도 여러 가지 광光이 깃들어 있다. 검다는 것이 환기하는 의미에는 어둡다, 시커멓다, 더럽다, 음험하다, 현묘하다, 마음씨가 나쁘다 등등의 다양한 층위가 있다. 까마귀는 더럽다고 할 수 있다면, 까마귀는 현묘하다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속인은 그럴 수가 없다. 다시 연암은 검다는 말을 흑黑·암闇·현玄·칠漆 등으로 분절한다. 검다고 사물을 다 비추지는 못한다. 옻칠만이 사물을 비출 수 있고, 수면의 검은[玄] 빛 만이 사물을 비출 수 있다. 검은 옷은 사물을 비추지 못하고, 어둠도 사물을 비추지는 못한다. 단지 검다는 말 속에도 뜻밖에 이렇듯 다양한 의미망이 존재하고 있다. ‘검다’라는 단어를 선입견을 가지고 보지 말아라. 그 색에 현혹되지 말고, 그 빛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꼴 속에는 다양한 태가 깃들어 있다. 나는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 기쁠 때 웃는 나와 분노로 성내는 나는 다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아닌가? 아버지로서 근엄하게 야단치는 내가 있고, 자식으로서 공손히 순종하는 내가 있다. 교실에서 강의할 때의 나와, 스승 앞에서 가르침을 청할 때의 나는 내가 보기에도 판이하다. 이럴 때 나는 나인가? 그 다양한 태態를 나는 인정하며 살아간다. 그것을 융은 퍼소나persona라 이름짓고, 시인은 시적 화자라 부른다. 내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나,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좀전과 지금이 같지 않은 나, 그 많은 나들을 나는 나라고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속인은 싸늘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 속에서 진정한 단 하나의 나, 나다운 나, 완성된 나를 찾아야만 할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제 연암은 형形과 태態의 관계를 부연하기 위해 미인을 끌어들인다. 그림 속에 그려진 미인은 다양한 동작을 취하고 있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구나. 그녀는 지금 부끄러운 것이다. 턱을 괴고 넋을 놓고 있구나. “내 님은 누구실까? 어디 계실까?” 그녀의 마음은 이런 것이었을게다. 달빛 아래 홀로 선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멀리 떠나간 님을 향한 그리움을 읽는다. 아! 그녀가 눈썹을 찡그리고 있다. 알지 못할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그늘을 드리운 것이다. 높은 난간에 올라 먼데를 바라보는 그 뜻은 님이 이제나 저제나 오실까 해서임을 나는 안다. 파초 그늘 아래서 위를 올려다 보는 그녀. 그녀는 무언가 잘 이뤄지지 않는 바램을 지니고 있구나. 
만약 그 많은 미인도의 모습이 한결같이 금세 깨끗이 재계하고 나온 듯 하고, 흙으로 빚어놓은 조각처럼 단정해야만 한다고 우긴다면, 나는 그런 사람과 더불어 그림을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 미인은 단정해야 한다. 덕성이 넘쳐흘러야 한다. 서 있는 것도 앉아 있는 것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그런 미인을 나는 진흙으로 빚은 미인이라고 부르련다. 형形만 있고 태態는 없는 미인은 미인이 아니다. 분칠한 아름다움만으로는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예쁘고 화려한 옷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자태가 있어야 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태에서 나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반대로 우리는 그림 속 미인의 자태를 보고 그녀의 속마음을 읽어낼 수가 있다. 하나의 몸짓 속에 서로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청나라 때 장조張潮는 《유몽영幽夢影》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습이 추한대도 볼 만한 사람이 있고, 비록 추하지 않지만 볼 만한 구석이라곤 없는 사람이 있다. 글이 문리는 통하지 않아도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있고, 비록 문리는 통하지만 지극히 혐오스러운 것도 있다. 이것은 천박한 사람에게는 쉽게 알려주지 못하는 이치이다. 
貌有醜而可觀者, 有雖不醜而不足觀者; 文有不通而可愛者, 有雖通而極可厭者. 此未易與淺人道也. 

사람들은 형만 보고 태는 보지 않는다. 겉모습에만 현혹된다. 그래서 언제나 허전하다. 늘 속고만 산다. 치통을 앓아 뺨에 한 손을 가볍게 대고서 살짝 찌푸린 양귀비의 표정은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슬픈 이야기에 젖어 촛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쪽진 머리를 매만지는 번희樊姬, 그녀의 눈가를 촉촉히 적시는 눈물은 얼마나 고혹적이었을까? 그녀에게 왜 빚어 놓은 듯이 단정하게 앉아 있지 않느냐고 나무랄 것인가? 그녀더러 어째서 얌전히 머리를 길게 늘이지 않느냐고 야단할 것인가? 그래도 화가들은 굳이 ‘양비병치도楊妃病齒圖’를 즐겨 그리고, 연극 작가들은 번희의 쪽진 머리 매만지던 일을 소재로 희곡을 썼다(청나라 서위舒位는 《번희옹계樊姬擁髻》라는 희곡을 남겼다). 사뿐사뿐 걸어가는 여인의 요염한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점잖치 못하다고 무조건 나무랄 것인가? 장중한 아악雅樂의 정무正舞만을 옳다하여 빠른 박자로 손뼉치며 휘휘 돌아가는 북방 호무胡舞의 날렵하고 경쾌한 춤사위를 거부할 것인가? 
연암은 이제 글을 마무리 한다. 내 조카 종선의 시 속에는 다양한 광光과 태態가 담겨 있다. 따라서 한가지 색色과 한가지 태態만을 기호하는 자들은 그의 시를 비웃으리라. 그러나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를 동방의 대가라고 부르고자 한다. 해오라비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가지고 학을 위태롭게 여기는 자들은 이를 하찮게 여겨 분노하고 성낼테지만, 나는 그의 자줏빛 까마귀와 비췻빛 까마귀를 사랑한다. 세상 사람들은 판에 박은 미인의 모습만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정작 그들이 사랑하는 미인은 피가 돌고 살이 부드러운 미인이 아니라, 진열장의 마네킹일 뿐이다. 
나는 언제 들어도 트롯트 가요가 좋은데 TV에서는 허구 헌 날 랩 송과 댄스 음악만을 틀어대고 있으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주변 사람에게 저것도 노래냐고,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저 지경이냐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다. 배꼽티는 날로 노출이 심해질 것이고, 청소년 문제는 갈수록 점입가경일 것이다. 언제나 세상은 곧 내일 망할 것 같은 말세였었다. 젊은이들은 항상 버르장머리가 없었다. 연암의 그때도 그랬고, 지금의 여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아직 세상이 망했다는 소식이 들리질 않고, 젊은이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건강하게 성장해간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색色만 보고 광光은 외면하고, 형形만 볼뿐 태態는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데 있다. 연암은 《열하일기》 중 〈망양록亡羊錄〉에서 이에 대해 다시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근세의 잡극 중에 〈서상기西廂記〉를 공연하면 지루해서 졸음이 오는데, 〈모란정牧丹亭〉을 공연하면 정신이 번쩍 들어 귀 기울여 듣는다. 이것은 비록 여항의 천한 일이지만 백성들의 습속과 취향이라는 것이 때에 따라 옮기어 바뀐다는 것을 증거하기에 충분하다. 사대부가 옛 음악을 회복하려고 마음 먹고서 가락과 곡조가 바뀐 것은 모르고서 이에 갑자기 쇠북과 피리를 부수고 고쳐서 원래의 소리를 찾고자 한다면 사람과 악기가 모두 없어지기에 이를 것이다. 이것이 어찌 화살을 따라가서 과녁을 그리고, 술 취함을 미워하면서 억지로 술 마시게 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如近世雜劇, 演西廂記, 則捲焉思睡; 演牧丹亭, 則洒然改聽. 此雖閭巷鄙事, 足驗民俗趣尙, 隨時遷改. 士大夫思復古樂, 不知改腔易調, 乃遽毁鍾改管, 欲尋元聲, 以至人器俱亡. 是何異於隨矢畵鵠, 惡醉强酒乎?

정곡을 꿰뚫는 명궁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고 화살이 맞은 곳마다 쫓아가서 과녁을 설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화살이 과녁을 찾아가야지, 과녁이 화살을 찾아가는 법이 없다. 표적이 바뀌면 조준이 달라지듯, 시대가 바뀌면 취향도 바뀐다. 내가 쏘는 화살만은 반드시 과녁을 뚫어야 된다는 법이 없다. 여기서 억지가 생기고 무리가 따른다. 이미 달라진 옛 음악을 이제와 복원하려 한들 가능키나 하겠으며, 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원래의 소리란 없다. 당시에는 그것도 변화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이다. 있지도 않은 원래의 소리 때문에 지금 귀에 익은 소리를 버릴 수는 없다. 술 취해 비틀대는 꼴이 보기 싫거든 아예 술을 멀리할 일이다. 그런데 왜 싫은 술을 억지로 마시고 싫다는 술을 굳이 권하는가? 
아! 세상에는 달사를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속물들의 속물 근성만 힘을 발휘하는 세상이다. 차라리 입을 닫고 침묵하리라. 그러면 그들의 노여움을 모면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입을 열어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 그러나 막상 말하고 나니 답답하구나. 시인들이여! 그대들이 사물을 바라보는 형편은 어떠한가?


1. 

하나의 색(色) 속에 깃들어 있는 온갖 빛깔(光)을 볼 수 있고, 
하나의 형상(形) 안에서 풀어져나가는 무수한 태(態)를 보아야 한다. 

제대로 본 바가 적은 사람은 세상 온갖 것들을 자기가 가진 부족함으로 보려하니 
어그러지고 곡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통달한 사람은 언제나 정곡을 꿰뚫는다.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사물을 사물로서 볼 수 있고, 
사건을 사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소인들은 자기를 통해 세상을 보지만, 도인은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눈 뜨고도 눈 감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태에서 나오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색과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묘한 법을 볼 수 있으리라. 


"모습이 추한대도 볼만한 사람이 있고, 비록 추하지는 않지만 볼만한 구석이 없는 사람이 있다."



Posted by 청공(靑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