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2015. 6. 16. 23:42

출처: 유시민 홈페이지 '자유인의 서재' (http://www.usimin.net/?p=123)


누군가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다. “그래, 당신 자신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을 알겠다. 그러면 당신은 구체적으로 무얼 하면서 어떻게 살고 싶은 건가?” 특별한 것은 없다. 무엇보다 먼저 내가 즐거운 일을 하고 싶다. 그 일이란, 배우고 깨닫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작업이다.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와 형제자매들, 삶과 세상에 대해 깊은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적은 수의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

세상과 민중에 대한 추상적 사랑보다는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고 몸으로 껴안는 실제적인 사랑을 더 많이 나누고 싶다. 놀고 싶다. 다시 그림을 그리고, 요가를 배우고 싶다. 북한산 둘레길을 걷고, 추자도에서 감성돔을 낚고,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주말 저녁 축구장과 야구장에서 소리를 지르고 싶다. 내면에서 솟아나는 욕망을 긍정적으로 표출하면서 살고 싶다. 사실 누가 그걸 하지 못하게 막은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내 스스로를 가두어버려서 그렇게 되었다.

나는 또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더 넓게 연대하면서 살고 싶다. 사명감과 의무감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내가 기꺼이 하고 싶고 내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하고 싶다. 거리에 나갈 수 없었던 2008년 촛불집회가 생각난다. 그 싸움은 광우병 쇠고기가 수입될 위험에 대한 두려움과 국민의 의견을 무시한 대통령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되었다. 시민들은 대통령이 국민의 요구에 귀 기울여 주기를 소망했다. 나는 똑같은 두려움과 분노를 느꼈고 똑같은 소망을 품었지만 거기 나가지 못했다. 인터넷 생중계를 보면서 마음을 보탰을 뿐이다. 정치를 잘못해서 정권을 빼앗긴 세력이라고 비난받는 것이 아팠다. 자칫 사진이라도 찍혔다가는 촛불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한다는 논란을 일으켜 시민들에게 폐를 끼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느꼈다.

그러나 가장 무거웠던 것은 직업정치인이라는 객관적으로 규정되는 나의 ‘정체성’이었다. 나는 현실정치의 맥락에 포획당한 사람이었다. 나의 모든 행위가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른 것으로 규정당하고 해석되는 한 떳떳하고 기쁜 마음으로 사회적 연대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계속 이렇게 산다면 온전하게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을 것 같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아포리아, 2013, 63-64쪽)


1.

이 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추상적인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정의원칙과 합리적 사고가 사회에서 작동하여야 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나라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삶과 그들의 세상을 위해서 헌신했던 사람이 현실세계에서의 한계로 인해 국가적 의사결정의 참여자 혹은 관계자인 공인의 삶에서 일반 국민으로서의 자연인의 삶을 선택한 것이 아쉽다. 

추구하는 가치과 권력과 돈 뿐이라면 게임의 룰 또한 그 수준에서 정립될 것이다. 추상적인 가치도 없고, 인본적인 가치 또한 없으며, 도덕과 윤리조차 없다. 있어보인다 하여도 그것은 목적적 가치가 아닌 도구적 가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와 메르스의 문제는 정파를 떠난 국가적인 문제임에도... 그 한계는 여전하다. 어떻게 변화를 일궈야할 것인가... 요원해보인다. 나는 아직 현명하지 않다. 



Posted by 청공(靑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