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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2.05 일이관지(一以貫之)
생각2017. 2. 5. 03:02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자왈 삼호 오도 일이관지)

공자께 말씀하셨다.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었느니라."


曾子曰 "唯." 
(증자왈유)

이에 증자가 "예"하고 답하였다. 


子出, 門人問曰 "何謂也?"
(자출문인문왈 하위야)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들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증자왈 부자지도 충서이이의)

증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道)는 충(忠)과 서(恕)일 뿐입니다."



세계는 무엇인가?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위에 예시된 논어의 구절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있어서 이보다 간결하고 옳은 답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을 대하고, 어떠한 일을 함에 있어 
진실된 마음을 다하고(忠)
타인의 입장을 역지사지, 즉 타인의 입장을 헤아려 공감한다면(恕)
항상 자신이 임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성 혹은 이론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부단히 칼로 자르듯, 줄로 가는 듯, 정으로 쪼는 듯, 숫돌로 광을 내는 듯 다스림으로써
마치 맑은 호수와 거울처럼 고요히 할 때 저절로 몸짓 하나, 말 한마디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경지일 것이다. 

그 길에서는 자신의 마음에 삿됨(私)이 자리잡는 것을 항상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삿된 마음으로 인하여 진실된 마음에서 멀어지고..
결국 자기가 자신을 속이고, 자기가 자신을 망하는 길로 이끌게 되기 때문이다. 

삿된 마음은 수양이 깊어질수록 그 모습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자연스러워진다. 
따라서 밝게 보는 지혜가 없이는 가랑비에 옷이 젖듯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들어 
삿됨이 원래 내 몸인양 달라붙어 버리고는 결코 다시는 바른 길로 돌아서지 못하게 된다. 


본디 사람이란 짐승이기 때문에 내 몸에 편한 것을 찾아가게 마련이니, 
사사로움이란 그러한 본성에 순(順)하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짐승에게 없는 생각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짐승에게는 없는, 오직 사람에게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병폐가 생긴다. 

동물은 자기 배를 채우고 나면 더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고 안주하기에 자연을 거스르지 않지만, 
사람은 생각이 자기 자신을 속이기 때문에 그 삿됨이 끝간 데 없이 자라날 수가 있다. 
그리고 사람마다 제각각 이러한 욕심이 키우다보면, 서로 싸우고 뺏고 해치게 된다. 
같은 사회 안에서 살아야 함에도 서로 믿을 수 없고, 반목하게 되고, 결국 파멸로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람에게는 이를 막을 수 있는 힘 또한 있다. 
공자가 말하는 서(恕), 자기 자신을 비추어 남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공감능력이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만큼이나, 공감능력은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하다. 
개인의 이기심-삿된 마음(私)-이 생각으로 인해 끝없이 커지는 것을, 
저 사람도 나처럼 고통받지 않고 행복하길 원한다는 것을 앎으로서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감은 사람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초가 된다. 

(恕)는 사사로운 마음(私)이 커지는 것을 막아내고 내려놓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삿된 마음을 버리고 항상 진실한 마음(忠)으로 항상 살아갈 수 있다면, 
사람은 본래 어진 마음(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짐승은 다른 개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본능에서 일어나기에 순수하지만 그 한계가 뚜렷하다. 
허나 사람이 생각과 공감을 발판삼아 본능을 뛰어넘어 어진 마음(仁)을 갖게 된다면,
그와 같은 인간의 사랑하는 마음은 그 경계가 끝이 없고, 그 깊이가 잴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이 사사로움(私)을 끝까지 따르면 사람은 짐승으로 태어났으나 짐승보다 못한 자가 된다. 
삿된 생각은 영혼을 황폐하게 한다. 사사로움을 취하다보면 타인을 헤아리는 마음(恕) 또한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공에 도취하여 중독되는 CEO들이 뇌내 호르몬 분비의 균형이 깨져 공감능력을 상실해가는 것이 바로 그 예이다. 
공감능력을 잃는 것, 이는 곧 타인과의 연결고리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자폐증이라면 자기 만의 세계에 갇히기에 다른 이에게 딱히 피해를 줄 일도, 이유도 없다. 
그러나 사사로움에 취해 잘못된 길을 가는 이들의 마음은 외부와의 심리적 유대는 단절되었으나, 
자신의 욕심은 끊임없이 외부세계로 뻗어져 나간다. 이로 인해 결국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람은 한없이 잔인해질 수 있다. 
따라서 그가 가지고자 하는 권력과 물질이 크면 클수록 자신과 남에게 끼치는 해가 이루말할 수 없이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잘못된 마음씀으로 인해 변해버린 사람의 뇌는 돌이킬 수 없다. 
정신의 변화가 이미 물질의 변화를 초래했기 때문에 불가역적이다.  
결국 다른 무수한 존재들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그의 영혼은 더이상 깊은 행복과 평화를 얻을 수 없고, 
보잘것 없는 얕은 차원의 욕구충족과 쾌락만이 그의 악행의 댓가로 주어질 뿐이다. 

이 짧은 인생, 자신과 남들에게 하지 못할 일만 하다가 죽음 앞에 놓여 초라하고 비루하게 사라져가게 된다. 
아무리 그 겉이 번지르르 한 들 죽음 앞에서 그 의미를 잃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그를 위로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사람은 항상 삿됨(私)을 경계해야 하는 법이고, 
자기자신을 수양하고, 바른 가치를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항시 충(忠)과 서(恕)로 귀결되는 덕목을 벗 삼아 이같은 사람의 본성을 역(逆)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법이다. 

한 마리 짐승으로 태어나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길은 
언제나 거꾸로 거슬러가는 굽이치는 가파른 길이기에
그 길은 항상 험난하고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최상승의 지혜를 깨우친 사람에게는 오직 그 길 밖에 가야한 길이 없을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더 깊고, 더 넓어지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대붕역풍비(大鵬逆風飛) 생어역수영(生魚逆水泳)이란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연유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이는 한없는 어진 마음(仁)에 이르기 위해 살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일생은 자기 내면에 도사리는 삿됨(私)이라는 본성의 극복과, 
세상사람들의 삿됨(私)으로 비롯된 외부세계의 불의와 그로 인한 고통을 없애는 일에 바쳐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여정에서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을 이긴 연후에 외부의 경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먼저 내부의 적을 없애고, 단결해야 하는 이치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아득히 멀어보이는 길의 끝은 언제 다다를 수 있을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삿되고 거짓된 삶이 아닌 바르고 진실된 삶을 살게 되는 날은 언제 올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피안으로 다다라야 한다. 
그 길 밖에는 가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남과 살아감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지만,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는 지혜가 있다면 명약관화하다. 
예수와 부처, 소크라테스와 공자가 평생을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깨우쳤던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Posted by 청공(靑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