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2017. 1. 30. 05:51


어릴 적 철학을 공부해보겠다고 도덕경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 책을 깊이 이해하여 그 생각을 내 삶 속에서 실천하거나, 체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적어도 그것을 갖고 남들과 논하며 이해 못한 것이 있지 않나? 잘못 이해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닌가 점검을 했어야 했습니다. 

조금 더 성숙한 뒤에 논어모임을 꾸려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이들과 나누어보니...
시간이 흘러도 전체의 윤곽이 희미해질지언정 분명히 남는 바가 있었습니다. 

혼자서 하는 공부는 제대로 된 궤도에 오르기 전에 위태로운 법이기에..
동양철학을 전공하지도, 소양이 깊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배움을 위해서 도덕경을 공부하며
배운 바를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최진석 교수의 '도덕경'을 읽고, 이를 바탕으로 원래 텍스트와 더불어 제가 이해한 바를 풀 생각입니다. 


1.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요, 
이름 지어질 수 있는 이름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2. 
無, 天地之始. 有, 萬物之母. 
무, 천지지시. 유, 만물지모. 

"무(無)는 천지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有)는 만물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3.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이런 고로 항시 무를 통해 오묘함이 드러내려 하고, 
유를 통해서는 경계를 나타내려 함이다."


4.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차량자, 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이 둘은 같이 나와 이름을 달리하니, 같이 있음을 현묘하다 한다. 
현묘하고 현묘하구나, 이 것이 온갖 미묘함이 들고나는 문이로다."


Posted by 청공(靑空)
동양철학2015. 10. 18. 07:52

上士聞道, 勤而行之 (상사문도, 근이행지)

- 높은 단계의 학자는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하나,


中士聞道, 若存若亡 (중사문도, 약존약망)

- 중간 단계의 학자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고, 


下士聞道, 大笑之 (하사문도, 대소지)

- 낮은 단계의 학자는 도를 듣고는 크게 비웃어 버린다. 


不笑不足以爲道 (불소부족이위도) 

- 그런 족속들이 웃지 않는다면 오히려 도라 할 수 없을 것이다. 


故建言有之 (고건언유지) 

-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明道若昧 (명도약매) 

- 밝은 길은 어두운 듯 하고, 


進道若退 (진도약퇴) 

- 나아가는 길은 물러나는 듯 하며, 


夷道若纇 (이도약뢰) 

- 평평한 길은 울퉁불퉁한 듯 하고, 


上德若谷 (상덕약곡) 

- 높은 덕은 골짜기와 같으며, 


大白若辱 (대백약욕)

- 큰 맑음은 더러운 듯 하고, 


廣德若不足 (광덕약부족)

- 넓은 덕은 모자란 듯 하며, 


建德若偸 (건덕약투)

- 건실한 덕은 게으른 듯 하며, 


質眞若渝 (질진약토)

- 참된 바탕은 변한 듯 하다. 


大方無隅 (대방무우)

- 큰 사각형은 모서리가 없고, 


大器免成 (대기면성)

-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으며, 


大音希聲 (대음희성)

- 큰 소리는 소리가 없고, 


大象無形 (대상무형)

- 큰 형상은 모습이 없다. 


道隱無名 (도은무명)

- 도는 감추어져 이름이 없으나, 


夫唯道, 善始且善成 (부유도 선시대선성)

- 오직 도만이 온당한 시작과 이룸을 할 수 있다. 


Posted by 청공(靑空)
동양철학2015. 6. 17. 23:10

출처: 정민교수님의 '옛사람 내면풍경' (http://jungmin.hanyang.ac.kr/)


눈뜬 장님
一夜九渡河記와 幻戱記後識



강물은 두 산 사이에서 나와 바위에 부딪치며 사납게 흘러간다.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결, 구슬피 원망하는듯한 여울은 내달리고 부딪치고 뒤엎어지며 울부짖고 으르렁대고 소리지르니, 언제나 만리장성마저 꺾어 무너뜨릴 기세가 있다. 만대의 전차와 만 마리의 기병, 만대의 대포와 만개의 북으로도 그 무너질 듯 압도하는 소리를 비유하기엔 충분치 않다. 모래 위에는 큰 바위가 우뚝하니 저만치 떨어져 서 있고, 강가 제방엔 버드나무가 어두컴컴 흐릿하여 마치도 물 밑에 있던 물 귀신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와 사람을 놀래킬 것만 같고, 양옆에서는 교룡과 이무기가 확 붙들어 나꿔채려는 듯 하다. 어떤 이는 이곳이 옛 싸움터인지라 황하가 이렇듯이 운다고 말하기도 하나,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강물 소리는 어떻게 듣는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河出兩山間, 觸石鬪狼, 其驚濤駭浪憤瀾怒波哀湍怨瀨, 犇衝卷倒, 嘶哮號喊, 常有摧破長城之勢. 戰車萬乘, 戰騎萬隊, 戰砲萬架, 戰鼓萬坐, 未足諭其崩塌潰壓之聲. 沙上巨石屹然離立, 河堤柳樹, 窅冥鴻濛, 如水祗河神爭出驕人, 而左右蛟螭試其挐攫也. 或曰此古戰場故河鳴然也, 此非爲其然也. 河聲在聽之如何爾. 

내 집은 산 속에 있는데, 문 앞에는 큰 시내가 있다. 매년 여름에 소낙비가 한 차례 지나가면 시내물이 사납게 불어 항상 수레와 말이 내달리고 대포와 북소리가 들려와 마침내 귀가 멍멍할 지경이 되었다.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 비슷한 것에 견주어 이를 듣곤 하였다. 깊은 소나무에서 나는 퉁소소리는 맑은 마음으로 들은 것이요,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소리는 성난 마음으로 들은 것이다. 개구리 떼가 앞다투어 우는 소리는 교만한 마음으로 들은 것이고, 일만 개의 축筑이 차례로 울리는 소리는 분노하는 마음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천둥이 날리우고 번개가 내리치는 소리는 놀란 마음으로 들은 까닭이요, 찻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는 운치있는 마음으로 들은 때문이다. 거문고의 높은 음과 낮은 음이 어우러지는 소리는 슬픈 마음으로 들은 것이요, 문풍지가 바람에 우는 소리는 의심하는 마음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듣는 소리가 모두 다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은 단지 마음 속에 생각하는 바를 펼쳐놓고서 귀가 소리를 만들기 때문일 뿐이다. 
余家山中, 門前有大溪, 每夏月急雨一過, 溪水暴漲, 常聞車騎砲鼓之聲, 遂爲耳崇焉. 余嘗閉戶而臥, 比類而聽之. 深松發籟此聽雅也, 裂山崩崖此聽奮也, 群蛙爭吹此聽驕也, 萬筑迭響此聽怒也, 飛霆急雷此聽驚也, 茶沸文武此聽趣也, 琴諧宮羽此聽哀也, 紙牕風鳴此聽疑也. 皆聽不得其正, 特胸中所意設而耳爲之聲焉爾. 

이제 나는 한밤 중에 한 줄기 황하를 아홉번 건넜다. 황하는 장성 밖에서 나와 장성을 뚫고서 유하와 조하, 황화와 진천 등 여러 물줄기를 한데 모아, 밀운성 아래를 지나면서는 백하가 된다. 나는 어제 배를 타고서 백하를 건넜는데, 이곳의 하류이다. 내가 아직 요동 땅에 들어서지 않았을 때 바야흐로 한 여름 불볕 속에 길을 가다가 갑자기 큰 강물이 앞에 나오는데, 붉은 파도가 산처럼 일어서며 그 끝간데가 보이지 않았다. 이는 대개 천리밖에 폭우가 내린 때문이었다. 
今吾夜中一河九渡. 河出塞外, 穿長城, 會楡河潮河黃花鎭川諸水, 經密雲城下爲白河. 余昨舟渡白河, 乃此下流. 余未入遼時, 方盛夏行烈陽中, 而忽有大河當前, 赤濤山立, 不見涯涘, 蓋千里外暴雨也. 

물을 건널 때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길래, 혼자 생각에 사람들이 고개를 우러러 하늘에 묵묵히 기도를 드리는가 싶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물을 건너는 사람이 물이 세차게 거슬러 올라가며 소용돌이 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제 몸조차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하고, 눈은 강물을 따라 내려가는 것만 같아 문득 어찔해지며 빙글 돌아 물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니, 그 머리를 우러름은 하늘에 기도하자는 것이 아니라 물을 피하여 보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다. 또한 어느 겨를에 경각에 달린 목숨을 묵묵히 빌 것이랴. 
渡水之際, 人皆仰首視天, 余意諸人者, 仰首黙禱于天. 久乃知渡水者, 視水洄駛洶蕩, 身若逆溯, 目若沿流, 輒致眩轉墮溺. 其仰首者非禱天也, 乃避水不見爾. 亦奚暇黙祈其須臾之命也哉. 

그 위태로움이 이와 같은데도 강물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모두들 요동 평야는 평평하고 광활하기 때문에 물줄기가 성내 울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황하를 모르고서 하는 소리다. 요하遼河가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밤중에 건너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낮에는 능히 물을 볼 수 있는 까닭에 눈이 온통 위험한데로만 쏠려서 바야흐로 부들부들 떨려 도리어 그 눈이 있음을 근심해야 할 판인데 어찌 물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한밤중에 강물을 건너매, 눈에 위태로움이 보이지 않자 위태로움이 온통 듣는데로만 쏠려서 귀가 바야흐로 덜덜 떨려 그 걱정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其危如此而不聞河聲. 皆曰遼野平廣故水不怒鳴, 此非知河也. 遼河未嘗不鳴, 特未夜渡爾. 晝能視水故, 目專於危, 方惴揣焉, 反憂其有目, 得安有所聽乎? 今吾夜中渡河, 目不視危, 則危專於聽. 而耳方惴揣焉, 不勝其憂. 

내가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이 텅비어 고요한 사람은 귀와 눈이 탈이 되지 않고, 눈과 귀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더더욱 병통이 되는 것임을. 이제 내 마부가 말에게 발이 밟혀 뒷 수레에 실리고 보니, 마침내 고삐를 놓고 강물 위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올려 발을 모두니, 한 번 떨어지면 그대로 강물이었다. 강물로 땅을 삼고 강물로 옷을 삼고 강물로 몸을 삼고 강물로 성정을 삼아 마음에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고나자 내 귀 속에 마침내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번을 건넜으되 아무 걱정 없는 것이, 마치 앉은 자리 위에서 앉고 눕고 기거하는 것만 같았다. 
吾乃今知夫道矣. 冥心者, 耳目不爲之累, 信耳目者, 視聽彌審而彌爲之病焉. 今吾控夫足爲馬所踐則, 載之後車, 遂縱鞚浮河, 攣膝聚足於鞍上, 一墜則河也. 以河爲地, 以河爲衣, 以河爲身, 以河爲性情, 於是心判一墮, 吾耳中遂無河聲. 凡九渡無虞, 如坐臥起居於几席之上. 

예전 우임금이 황하를 건너는데 황룡이 배를 등져 지극히 위태로왔다. 그러나 살고 죽는 판가름이 먼저 마음에 분명하고 보니 용이고 도마뱀이고 그 앞에서 크고 작은 것을 헤아릴 것이 없었다. 소리와 빛깔은 바깥 사물인데 바깥 사물이 항상 눈과 귀에 탈이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보고 듣는 바름을 잃게 만듦이 이와 같다. 그러니 하물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그 험하고 위태로움이 황하보다 심하여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통이 됨에 있어서이겠는가? 내 장차 내 산 중에 돌아가 다시 앞 시내의 물 소리를 듣고 이를 징험하여, 장차 몸 놀림에 교묘하여 스스로 총명하다고 믿는 자를 경계하리라. 
昔禹渡河, 黃龍負舟, 至危也. 然而死生之辨, 先明於心, 則龍與蝘蜓不足大小於前也. 聲與色外物也, 外物常爲累於耳目, 令人失其視聽之正, 如此. 而況人生涉世, 其險且危, 有甚於河, 而視與聽, 輒爲之病乎! 吾且歸吾之山中, 復聽前溪而驗之. 且以警巧於濟身, 而自信其聰明者. 

〈일야구도하기〉는 《열하일기》 〈산장잡기〉 가운데 실려있다. 북경에 도착한 사신 일행에게 황제는 만리장성 밖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날짜를 정해 대어 오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큰 비에 물이 불어난 황하를 밤낮 없이 빠른 길을 찾아 재촉하다 보니, 그야말로 하루밤에 이리저리 강물을 아홉번씩이나 건너는 모험을 감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글은 그러니까 그때의 소감을 적은 글이다. 
놀란 듯 성난 듯 원망하는 듯 파도와 물결은 온통 내달리고 부딪치면서 거침없이 쏟아져 내린다. 우뚝 선 만리장성조차도 그 도도한 기세엔 맥없이 무너지고 말 지경이다. 만대의 전차와 만 마리의 기병, 만대의 대포와 만개의 북이 일시에 내달리고 일시에 포성을 내지르고 둥둥 울린다 해도 이 소리보다는 못할 것이다. 그 뿐인가? 강 가 모래 위에는 큰 바위가 저만치 떨어져 시커멓게 우뚝 서 있고, 강가 버드나무는 어두운 그늘을 만들어, 강물 속 물귀신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배 위에 탄 사람을 놀래킬 것만 같다. 뱃전을 할금대는 미친 물결은 마치 교룡과 이무기가 사람을 나꿔채 가려고 이따금씩 손톱을 곧추세워 할켜대는 것만 같다. 황하는 왜 이렇게 우는가? 옛 싸움터인지라 이곳에서 죽은 원혼들이 워낙에 많아 그렇게 우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소리는 어떻게 듣느냐에 달린 것일 뿐이다. 처음 느닷없이 황하의 미친 물결과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을 묘사하고 나서, 아직 그 광경에 눈이 팔려 있는 사이 어느새 연암은 본론으로 들어선다. ‘소리는 듣기 여하에 달려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두 번째 단락에서는 다시 부러 딴전을 부리며 글의 호흡을 고른다. 황해도 골짜기의 연암협에 있는 내 집 앞에도 큰 시내가 하나 있다. 여름철 소낙비가 한 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사납게 불어 수레소리 말소리, 대포소리 북소리가 뒤섞인 듯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문을 닫고 가만히 그 소리를 들어보면, 소리는 그때마다 다른 모양새로 내게 들려오는 것이다. 어떤 때는 강물 소리가 소나무 가지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가는 송뢰성松籟聲으로 들릴 때가 있다. 그것은 그 때 내 마음이 그렇듯이 맑았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답답하고 성난 일이 있을 때 그 소리는 문득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소리로 들렸다. 어떤 때는 한밤중에 개구리떼가 와글대듯 들리기도 했는데, 내 마음에 교만한 기운이 있어서 그랬던 것도 같다. 때로 물소리가 마치 일만개의 타악기가 동시에 둥둥 울리듯 들릴 때도 있었다. 그 때 나는 마음 속에 터질듯한 분노를 지니고 있었다. 
소낙비에 불어난 강물 소리는 사실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 문닫고 들어앉은 내게는 그 소리가 그때마다 다르게 들린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소리는 귀로 들은 소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은 소리일 뿐이다. 내 눈으로 직접 강물을 바라보지 않고, 단지 귀로만 들으니 마음이란 놈이 튀어나와 자꾸만 제 가늠으로 헛생각을 지어내어 허상을 꾸며내는 것이다. ‘소리는 귀로 듣지 않는다. 마음으로 듣는다.’ 같은 소리도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린다. 그럴진대 마음의 소리는 허상일 뿐인가? 
소리는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듣는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다시 논의는 황하로 돌아온다. 이제 나는 한밤 중에 황하를 아홉번이나 건넜다. 장성 밖에서 기세 좋게 장성을 꿰뚫고 나온 강물은 그밖에 여러 물줄기를 한데 모아 밀운성 아래에 이르러 장대한 백하를 이룬다. 그런데 이 강물은 그 규모란 것이 만만치 않아서, 대낮 땡볕 속에 길을 가다가 강물과 만났는데도, 붉은 파도가 산처럼 우뚝 높이 서 있는 것이다. 비도 오지 않는 이 땡볕 속에 웬 물결이냐고 의아해 하노라면, 문득 천리 밖에서 폭우가 내린 탓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천리 밖 폭우가 천리 아래에서 미친 물결을 일으키는 곳이 이곳 황하다. 그 규모는 내 시골집 앞을 흐르던 도랑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도랑물이 불어난 소리를 듣고도 내 마음은 이미 온갖 생각을 자아냈는데, 이제 이 엄청난 황하를 앞에 두고서 나는 또 무슨 생각을 일으킬 것인가?
강물을 건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아래를 보려들지 않는다. 하늘을 향해 목숨을 기도하는가 싶지만, 그 거세찬 소용돌이를 보노라면 머리가 온통 빙글빙글 돌고, 그 위에 눈길을 던지면 제 몸마저 그 물살을 따라 떠내려 갈것만 같아서 순간에 어찔해지며 강물 위로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일제히 고개를 쳐드는 것은 기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물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보면 안된다. 보면 탈이 난다. 눈에 현혹되지 말아라. 보이는 것이 실상은 아니다. 앞서는 소리는 마음으로 듣는다고 해 놓고, 여기서는 다시 눈 때문에 마음이 허상을 지어냄을 말하였다. 그렇다면 눈과 귀가 먼저인가? 아니면 마음이 먼저인가? 연암협에서는 마음이 귀로 들려오는 소리를 바꾸어 버렸고, 황하에서는 눈으로 보는 것이 내 마음을 뒤흔들어 버렸다. 여기에도 선후가 있는가?
이상한 것은 이런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미친 물결에 이 몸이 금세 떠내려 갈 것만 같이 빙글빙글 도는데도 정작 강물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결코 요동 평야가 평평하고 드넓어 그런 것이 아니다. 황하의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그 거센 물결에 눈이 온통 팔려서 미처 그 물결이 일으키는 굉음이 귀에 들어올 겨를이 없는 것일 뿐이다. 밤중에 건너면 상황은 완전히 반대로 된다. 낮에 보이던 그 물결의 어지러움은 없고, 한밤 중의 황하는 다만 소리로 건너는 사람의 넋을 다 앗아간다. 우르르르 하고 물결이 밀려들면 금세라도 내가 거기에 한데 휩쓸려 떠내려갈 것만 같고, 저리로 밀려가면 휴우 살았구나 싶다. 도대체 물살이 얼마나 큰지,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 조차 가늠할 수 없기에 두려움은 공포로 변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낮에는 눈에 보이는 격랑 때문에 소리가 들리지 않더니, 밤에는 정작 그 물결은 보이지 않는데 소리가 온갖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이다. 강물에는 귀로 들리는 소리가 있고, 눈으로 보는 물살이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내가 놓인 상황에 따라 들리기도 하고 들리지 않기도 한다.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 내 눈는 그대로인데 왜 보이고 보이지 않는가? 내 귀는 변함없건만 어째서 들리고 들리지 않는가? 그럴진대 나는 내 눈과 귀를 믿어야 옳을까? 아니면 내 마음을 믿어야 옳을까? 
아! 그랬었구나. 꼭같은 강물 소리도 내 마음의 빛깔에 따라 영 딴판의 소리로 들리는 것이로구나. 본시 내 눈과 내 귀란 것은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로구나. 내 마음이란 것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로구나. 그러면서 연암은 ‘명심자冥心者’와 ‘신이목자信耳目者’를 구분한다. ‘명심冥心’이란 속념을 끊어 마음을 고요하게 지니는 것이니, 당나라 수아修雅의 〈문송법화경가聞誦法華經歌〉에 “눈 감고 마음 비워 자세히 들으라. 合目冥心子細聽”의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명심’과 한가지 뜻이다. 그러니 ‘명심자’는 속된 생각을 들이지 않고 이목에 현혹되지 않는 고요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이에 반해 ‘신이목자’는 제 눈으로 보고 제 귀로 들은 것만을 신뢰하고, 직접 보고 듣지 못한 것은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다가 결국 그 때문에 진실을 놓치고 마는 사람이다. 
마음이 고요한 사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탈이 되지 않는다. 눈과 귀만을 믿는 사람은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할수록 더 탈이 된다. 그래서 황하의 소용돌이치는 물결을 보다가 제 몸도 따라 빙글 돌아 물에 떨어지기 일쑤이고, 귀 멍멍한 소리에 기가 질려 어쩔 줄 모르게 된다. 발다친 마부 때문에 말고삐 잡아줄 말구종꾼도 없이 혼자 말안장 위에 발을 모우고 앉아 흔들흔들 황하를 건넜다. 자칫 기우뚱 하는 날엔 그대로 황하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마음을 고요히 비워 황하와 내가 하나가 되고 보니, 마침내 그 우레와 같이 쿵쾅대던 강물소리는 내 귀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하루밤에 아홉번을 건너는 속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의 황황한 거동을 바라보며 나는 집안에 거처하듯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편안하게 강물을 건널 수 있었다. 소리를 귀로 들으려 하지 마라. 소리는 귀로 듣지 않는다. 텅 빈 마음으로 들어라. 귀로 듣는 소리는 마음에 공연한 작용을 일으켜 허상을 만들어낼 뿐이다. 마음을 비우면 내 안으로 강물 소리가 차올라서 내가 바로 강물이 된다. 
예전 우임금이 황하를 건널 때도 그랬다. 배가 황룡의 등위에 올라앉아 언제 어떻게 뒤집어질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우임금은 하늘의 뜻에 내맡겨 마음에 조금의 의심이 없었다. 그러자 황룡은 도마뱀이나 다를 바 없게 되었다.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 내 눈에 드는 빛깔은 모두 나와는 상관없는 바깥 사물일 뿐이다. 그런데 이 소리와 빛깔이 작용을 일으켜 내 눈과 귀에 탈이 생긴다. 그래서 마음이 덩달아 움직인다. 소리와 빛깔의 작용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려면 ‘명심’의 경계에 도달해야 하리라. 한 세상을 건너가는 일은 황하의 위험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럴진대 나는 내 눈과 귀를 경계해야 하리라. 내 마음을 우선 다스려야 하리라. 내 마음에서 눈과 귀가 일으키는 병통을 걷어내야 하리라. 이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나는 다시 돌아가 내 앞 시내의 물 소리를 다시 들어 보겠다. 내 마음에 따라 온갖 빛깔을 지어내던 그 물소리를 다시 들어 보겠다. 내 마음을 텅 비우면 그 소리조차 지워질 것인지를 시험해보겠다. 그리고 이 깨달음으로 제 눈과 귀의 총명을 믿고서 스스로 처세에 능란하다고 믿는, 마침내 그로 인해 제 발등을 찍고 마는 자들을 경계하겠다. 

내가 오늘 밤에 이 물을 건넘은 천하에 지극히 위태로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말을 믿고 말은 발굽을 믿고, 발굽은 땅을 믿어 말고삐를 잡지 않은 보람을 거둠이 이와 같도다. 수역首譯이 주주부周主簿에게 말한다. 
“옛날에 〈위어危語〉를 지은 자가 있어 말하기를, ‘장님이 눈먼 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연못가에 섰도다’라고 했더니, 참으로 우리들의 오늘밤 일입니다 그려.”
내가 말했다. 
“그것이 위태롭기는 해도 위태로움을 잘 안 것은 아니라고 보네.”
두 사람이 말한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장님을 보고 있는 자는 눈이 있는 사람인지라, 장님을 보고는 스스로 그 마음에 위태롭게 여기는 것이지, 정작 장님은 위태로운 줄을 알지 못하는 법이거든. 장님은 위태로운 것이 보이질 않는데, 무슨 위태로움이 있겠는가?”
서로 더불어 크게 웃었다. 따로 일야구도하기를 적은 것이 있다. 
余今夜渡此河, 天下之至危也. 然而, 我則信馬, 馬則信蹄, 蹄則信地, 而乃收不控之效如是哉! 首譯語周主簿曰: “古有爲危語者, 謂盲人騎瞎馬, 夜半臨深池, 眞吾輩今夜事也.” 余曰: “此危則危矣, 非工於知危也.” 二人曰: “何爲其然也?” 余曰: “視盲者有目者也. 視盲者而自危於其心, 非盲者知危也, 盲者不見所危, 何危之有?” 相與大笑. 別有一夜九渡河記. 

위 대목은 《열하일기》〈막북행정록〉 속에서 앞서 〈일야구도하기〉를 적을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장님이 눈먼 말을 타고서 한밤중에 깊은 연못가에 서있다. 위태로움의 지극함을 묘사한 말이다. 한밤중에 물결이 넘실대는 강물을 아홉번이나 건넌 일은 그 아슬아슬하기가 여기에 견줄만 하다. 생각할수록 진땀이 흐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암은 여전히 뚱딴지 같은 소리만 하고 있다. 이 사람. 내 보기에 장님은 위태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보네. 정작 본인은 하나도 위태롭지 않건만 공연히 곁에서 지켜 보는 이가 위태롭게 보는 것일 뿐일세. 왜 그런가? 그는 눈앞에 뵈는 것이 없으니, 지금 제가 위태로운 연못가를 지나는지, 지금이 한 밤중인지, 또 제가 탄 말이 눈이 멀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으니, 그는 말을 믿고 말은 또 제 발을 믿고, 발은 또 땅을 믿어 그저 평지를 걷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을터이니 위태롭기는 무엇이 위태롭단 말인가? 공연히 눈 가진 우리가 곁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것일 뿐이지. 안 그런가? 
보이지 않으면 위태로움도 없다. 들리지 않으면 두려움은 없다. 위태로움과 두려움은 보고 듣는데서 생겨난다. 앞 못보는 장님에게는 조금의 두려움도 위태로움도 없다. 그는 손에 땀을 쥐게하는 위태로움 앞에서도 태연히 평지를 걷듯 뚜벅뚜벅 걷는다. 가히 ‘명심冥心’의 경계에 들었다 할만하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눈과 귀란 것은 또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이냐? 눈앞의 온갖 것에 현혹되어 옴짝달싹도 못하느니, 차라리 장님이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다시 책문밖에 이르러 책문 안을 바라다 보니 일반 집들도 모두 다섯 들보가 높이 솟았고, 띠로 이엉을 이어 위를 덮었는데, 등마루는 우뚝하고 대문은 가지런하였다. 거리는 평평하고 곧아서 양쪽 가로 마치 먹줄을 친 듯 하였다. 담장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 타는 수레와 짐 싣는 수레가 길 가운데로 이리저리 오가고, 벌려 놓은 그릇들은 모두 그림을 그린 자기들이다. 이미 그 제도를 보고 나니 시골구석의 촌티라고는 아예 없었다. 예전에 내 친구 홍덕보가 일찍이 규모는 큰데도 심법心法은 세밀하다고 말하더니, 책문은 천하의 동쪽 끝 모퉁이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매, 앞길의 유람이 갑자기 생각이 탁 막히면서 곧장 이 길로 되돌아가고만 싶어, 나도 몰래 배가 부글거리고 등이 타는 듯 하였다. 
復至柵外, 望見柵內, 閭閻皆高起五樑, 苫艸覆盖, 而屋脊穹崇, 門戶整齊, 街術平直, 兩沿若引繩然. 墻垣皆甎築, 乘車及載車, 縱橫道中. 擺列器皿, 皆畵瓷. 已見其制度,絶無邨野氣. 往者洪友德保, 嘗言大規模細心法, 柵門天下之東盡頭, 而猶尙如此, 前道遊覽, 忽然意沮, 直欲自此徑還, 不覺腹背沸烘. 

내가 크게 반성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질투심인게로구나. 내가 평소 성품이 담박하여 남을 부러워 하고 시기 질투하는 것은 본시 마음에 없었다. 이제 한 번 다른 지경으로 건너와 본바가 만분의 일에 불과 한데도 다시금 쓸데없는 망상이 이와 같음은 어찌된 것인가? 이는 바로 본바가 작은 까닭일 뿐이다. 만약 여래의 밝은 눈을 가지고 시방세계를 두루 살펴본다면 평등치 않음이 없으리라. 온갖 일이 평등하고 보면 절로 질투하고 선망하는 마음이 없게 될 것이다.”
장복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만일 네가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어떻겠느냐?”
“중국은 오랑캐인걸입쇼. 쉰네는 원하지 않습니다요.”
조금 있으려니까 맹인 한 사람이 어깨에 비단 주머니를 걸치고 손으로는 월금月琴을 타면서 걸어간다. 내가 크게 깨달아 말하였다. 
“저것이 어찌 평등안平等眼이 아니겠는가?”
余猛省曰: “此妒心也. 余素性淡泊, 慕羨猜妒, 本絶于中. 今一涉他境, 所見不過萬分之一, 乃復浮妄若是, 何也? 此直所見者小故耳. 若以如來慧眼, 遍觀十方世界, 無非平等. 萬事平等, 自無妒羨.” 顧謂張福曰: “使汝往生中國, 何如?” 對曰: “中國胡也. 小人不願.” 俄有一盲人, 肩掛錦囊, 手彈月琴而行. 余大悟曰: “彼豈非平等眼耶!”

여기에도 장님 이야기가 나온다. 《열하일기》〈도강록〉 중의 한 부분이다. 예전에 중국에 오기전 나는 중국이 뙈놈의 나라, 오랑캐의 천지인줄로만 알았다.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북벌北伐, 즉 ‘무찌르자 오랑캐’의 구호가 의당 그래야만 하는 진리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국경을 건너 중국 땅에 들어서고 보니, 중국에서는 가장 귀퉁이 시골의 하나임에 분명할 이곳의 문물이 내 이목을 압도해 온다. 우뚝한 들보 위에 이엉을 얹은 집들과 가지런한 대문들, 벽돌로 쌓은 담, 사통팔달로 죽죽 뻗은 도로 위로 이리 저리 부산하게 움직이는 각종 수레들, 하다 못해 집에서 쓰는 허드렛 그릇도 모두 그림을 그려 넣은 도자기 들이다. 이것이 우리가 무찌르자고 노래하던 오랑캐의 시골 모습인가? 시골이 이럴진대 그 서울은 또 어떠할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그만 부끄럽고 풀이 팍 꺾여서 그길로 내쳐 돌아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마음을 고쳐 먹기로 한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지 못한데서 비롯된 질투심일 뿐이다. 내 본 바가 워낙에 작고 보니, 조금만 새로운 것을 보아도 눈과 귀가 현혹되어 중심을 잃고 마는 때문이다. 문제는 내 눈이다. 만일 편견 없는 석가여래의 눈으로 시방세계를 살펴 본다면 조선이나 중국이나 다를 바 없으리라. 평등의 눈으로 보면 부러워 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이 다 스러지리라. 나는 ‘명심’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석가여래의 눈으로 돌아고자 한다. 
그래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말구종꾼 장복이에게 묻는다. “얘! 너 중국에 태어나고 싶지 않니?” 느닷없는 질문에 녀석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대답한다. “에이! 싫어요. 나으리. 중국은 뙈놈의 나라가 아닙니까요. 전 오랑캐는 되기 싫은걸입쇼.” 녀석의 논리는 단순하다. 오랑캐인 청나라가 지배하는 중국은 중국이 아니다. 제 아무리 문화와 문물이 발달해도 그것은 무찔러야 할 오랑캐일 뿐이다. 그렇지만 조선은 요순공맹의 도를 지켜나가고 있기에 문화와 문물이 아무리 뒤쳐져도 오랑캐가 아니라 중화中華인 것이다. 말 그대로 ‘못 살아도 나는 좋아’다. 아! 이념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로구나. 중국 먼 변방의 문물이 이렇듯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발달한 것이건만, 말구종꾼의 의식 깊은 곳까지 이른바 춘추의리란 것이 뿌리 박혀 있어, 좋은 것도 좋은 것으로 보려 들지를 않는구나. 
그때 마침 장님 하나가 비단주머니를 어깨에 걸치고서 월금을 타며 길을 걸어간다. 아! 그의 눈이야 말로 평등하겠구나. 오랑캐도 없고 중화도 없고, 보는 것으로 인한 시기심과 질투심도, 부끄러움도 자괴감도 없겠구나. 그의 눈이 곧 석가여래의 눈이로구나. 연암의 글에는 소경이 등장하는 것이 아직도 한 편 더 있다. 

이날 홍려시소경 조광련이 의자를 나란히 하고서 요술을 구경하였다. 내가 조경에게 말하였다.
“눈이 능히 시비를 판단치 못하고 진위를 살피지 못할진대 비록 눈이 없다고 해도 괜찮으리이다. 그러나 항상 요술하는 자에게 속게 되는 것은 이 눈이 일찍이 망녕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분명하게 본다는 것이 도리어 빌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려.”
조경이 말했다. 
“비록 요술을 잘하는 이가 있다 해도 소경은 속이기가 어려울터이니, 눈이란 과연 항상된 것일까요?”
내가 말했다. 
“우리나라에 서화담 선생이란 이가 있었지요. 밖에 나갔다가 길에서 울고 있는 자를 만났더랍니다. ‘너는 왜 우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세 살에 눈이 멀어 지금에 사십년이올시다. 전일에 길을 갈 때는 발에다 보는 것을 부치고, 물건을 잡을 때는 손에다 보는 것을 부치고, 소리를 듣고서 누구인지를 분간할 때는 귀에다 보는 것을 부치고, 냄새를 맡고서 무슨 물건인가를 살필 때는 코에다 보는 것을 부치었습지요.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으되, 저에게는 손과 발과 코와 귀가 눈 아님이 없었습니다. 또한 어찌 다만 손과 발, 코와 귀 뿐이겠습니까? 날이 이르고 늦은 것은 낮에 피곤함을 가지고 보았고, 물건의 모습과 빛깔은 밤에 꿈으로 보았지요. 장애될 것이 없어 일찍이 의심스럽거나 어지럽지 않았습지요. 이제 길을 가는 도중에 두 눈이 갑자기 맑아지고 백태가 끼었던 눈이 저절로 열리고 보니, 천지는 드넓고 산천은 뒤섞이어 만물이 눈을 가리고 온갖 의심이 마음을 막아서 손과 발, 코와 귀가 뒤죽박죽이 되어 착각을 일으켜 온통 예전의 일상을 잃게 되었습니다. 아마득히 집을 잃어 스스로 돌아갈 길이 없는지라, 그래서 웁니다.’ 선생이 말하였다. ‘네가 네 지팡이에게 물어본다면 지팡이가 응당 절로 알리라.’ 말하기를, ‘제 눈이 이미 밝아졌으니 지팡이를 어디에다 쓴답니까?’ 선생이 말하였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바로 거기에 네 집이 있으리라.’ 이로 말미암아 논한다면 눈이 그 밝음을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려. 오늘 요술을 보니, 요술장이가 능히 속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구경하는 사람이 스스로 속은 것일 뿐입니다.”
是日鴻臚寺少卿趙光連, 聯倚觀幻. 余謂趙卿曰: “目不能辨是非察眞僞, 則雖謂之無目可也. 然常爲幻者所眩, 則是目未嘗非妄, 而視之明, 反爲之祟也.” 趙卿曰: “雖有善幻難眩瞽者, 目果常乎哉.” 余曰: “弊邦有徐花潭先生. 出遇泣于道者曰: ‘爾奚泣?’ 對曰: ‘我三歲而盲, 今四十年矣. 前日, 行則寄視於足, 執則寄視於手, 聽聲音而辨誰某, 則寄視於耳, 嗅臭香而察何物, 則寄視於鼻. 人有兩目, 而吾手足鼻耳無非目也. 亦奚特手足鼻耳? 日之早晏, 晝以倦視, 物之形色, 夜以夢視, 無所障碍, 未曾疑亂. 今行道中, 兩目忽淸, 瞖瞙自開, 天地廖廓, 山川紛鬱, 萬物礙目. 群疑塞胸, 手足鼻耳, 顚倒錯謬, 皆失故常, 渺然忘家, 無以自還, 是以泣爾.’ 先生曰: ‘爾問爾相, 相應自知.’ 曰: ‘我眼旣明, 用相何地.?’ 先生曰: ‘還閉爾眼, 立地汝家.’ 由是論之, 目之不可恃其明也如此. 今日觀幻, 非幻者能眩之, 實觀者自眩耳.” 

역시 《열하일기》 중 〈환희기후지〉이다. 열하에서 거리의 요술을 보고나서 그 소감을 적은 대목이다. 스무가지에 달하는 요술장이의 요술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나서 연암은 시비도 가리지 못하고 진위도 분간할 수 없는 눈이란 없는 거나 진배없다고 말한다. 요술을 구경하는 사람이 속지 않으려고 자세히 보면 볼수록 더 잘 속게 된다. 앞서 〈일야구도하기〉에서, 보는 것이 자세하면 할수록 더욱더 미혹되어 급기야 강물에 빠지고 마는 ‘신이목자信耳目者’를 떠올린다. 그렇지만 천하의 요술장이도 장님을 속일수는 없다. 이어 연암은 이미 예전 〈답창애〉에서도 써먹은바 있는 서화담 이야기를 들고 나온다. 다만 내용은 이 글이 더 자세하다. 
세 살에 눈이 멀어 사십년간 소경으로 살아온 사람이, 제 손과 발을 눈으로 여기고 제 코와 귀를 눈으로 알며 아무 불편함 모르고 살아오던 그가, 어느날 길을 가다가 갑자기 눈이 열렸다. 그러자 평온하던 세계는 일순간에 혼란에 빠지고 만다. 제 눈을 대신하던 손과 발, 코와 귀는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 되어 버리고, 아직 내것이 아닌 내 눈은 온통 내 마음에 의심만을 일으켜 이 골목이 저 골목 같고, 이 대문이 저 대문 같아 제 집조차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눈을 뜨는 순간 오히려 눈이 멀어, 자신의 정체성에 심각한 위협을 받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망연자실 어쩔 줄 모르고 길 가에 서서 울고 있다. 눈을 떴으되 그 눈이 아무 소용 없으니 말 그대로 ‘눈 뜬 장님’이다. 
사연을 들은 서화담의 처방은 뜻밖에 간단하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눈으로 보려들지 말아라. 항상성을 회복하는 길, 정체성을 되찾는 길은 네 눈에 있지 않다. 오히려 네 손과 발, 네 코와 귀를 믿어라. 네 눈에 현혹되지 말고 네 지팡이를 믿어라. 불편함이 없던 세계, 아무 걸림이 없던 세계로 돌아가라. 네 마음의 평형을 깨뜨리는 의심의 덩어리를 놓아 버려라. 
이 우화는 읽기에 따라 여러 맥락으로 읽힌다. 〈답창애〉에는 같은 우화를 소개하면서, 그 앞에 “본분으로 돌아가라 함이 어찌 문장만이리오. 일체의 온갖 일들이 다 그렇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말하자면 장님이 눈을 도로 감는 것을 본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풀이한 것이다. 좋은 문장을 쓰려면 눈을 감아라. 훌륭한 시를 쓰고 싶거든 눈을 감아라. 문장이나 시만이 아니다. 인간 세상 온갖 일이 다 그렇다. 이때 눈을 감는다는 것은 ‘명심’의 상태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현혹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본래 자리, 세계와 교통할 수 있는 촉수가 싱싱히 살아있던 그 지점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사십년간 장님으로 살아오던 그에게 개안은 과연 천지개벽과도 같은 놀라움이었겠지만, 그로 인해 자신을 잃고 만다면, 개안의 기쁨은 잠깐일뿐 그에게는 더큰 불행을 가져다 줄 따름이다. 
‘본분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단지 ‘네 주제, 네 분수를 알아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장님 주제에 만족하고 눈 뜰 생각 아예 말고 지팡이만 믿고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면 어떤 눈뜸도 기쁨이기는커녕 새로운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내가 소화할 수 없는 세계, 내 것이 아닌 바깥 세상만을 기웃거리다가는 오히려 나 자신을 잃게 될 뿐이다. 조나라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려다 오히려 제 본래의 걸음 마저 잃고 엉금엉금 기어 갔다는 저 연나라 소년의 ‘한단학보邯鄲學步’를 기억하는가? 서시의 찡그림을 흉내내다가 온 마을 사람으로 하여금 대문을 닫아걸게 만들었던 동시의 이야기가 생각나는가? 시류만을 좇아 이리저리 몰려 다니지 말아라. 남의 흉내나 내다가는 결국 제 목소리마저 잃고 만다. 돌아가야 할 제 집마저 찾지 못하게 된다. 길에서 울게 된다. 눈을 믿지 마라. 부릅뜨고 볼수록 더 현혹된다. 도로 눈을 감아라. 마음으로 보아라. 


1. 

황하를 건너면서 눈과 귀에 현혹이 되어버리면 위태로움에 처하게 된다. 
하물며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인생길은 얼마나 어려움이 많으랴.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이 글에서 연암은 명심자(冥心子)와 신이목자(信耳目子)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윽하고 고요한 마음을 가진 이와, 눈과 귀를 통해 경계에 끄달리는 마음을 가진 이의 차이점을 말하며...
본 것이 작음에 자기의 눈과 귀만 믿고,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는 이들을 얘기한다. 

장님 주제에 눈을 떠서 무엇하랴. 

Posted by 청공(靑空)
동양철학2015. 6. 17. 02:08

출처: 정민교수님의 '옛사람 내면풍경' (http://jungmin.hanyang.ac.kr/)


중간은 어디인가?
蜋丸集序와 孔雀舘文稿自序


자무子務와 자혜子惠가 나가 놀다가 장님이 비단옷 입은 것을 보았다. 자혜가 휴우 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아아! 제게 있는데도 보지를 못하는구나.”
자무가 말하였다. 
“대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비교하면 어떨까?”
마침내 서로 더불어 청허선생聽虛先生에게 이를 물어보았더니, 선생은 손을 내저으며 
“나는 모르겠네. 나는 모르겠어.”
하는 것이었다. 
子務子惠出遊, 見瞽者衣錦. 子惠喟然歎曰: “嗟乎! 有諸己而莫之見也.” 子務曰: “夫何與衣繡而夜行者?” 遂相與辨之於聽虛先生, 先生搖手曰: “吾不知, 吾不知.”

예전 황희黃喜 정승이 공무를 파하고 돌아오니, 그 딸이 맞으며 말하였다. 
“아버님, 이[蝨]를 아시는지요? 이는 어디서 생기나요? 옷에서 생기나요?” 
“그렇지.”
딸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이겼다!”
하자 며느리가 청하여 말하기를, 
“이는 살에서 생기지요?”
“네 말이 맞다.”
며느리가 웃으며 말하기를, 
“아버님은 내가 맞다시는 걸요.”
하였다. 부인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누가 대감더러 지혜롭다 하겠수. 다투고 있는데 둘다 옳다니요?”
정승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였다. 
“둘다 이리 오너라. 대저 이는 살이 아니면 알을 까지 못하고, 옷이 아니고는 붙어있질 못한다. 그래서 두 사람의 말이 모두 옳은 것이야. 비록 그렇긴 해도 옷이 장롱 속에 있어도 또한 이는 있고, 설사 네가 벌거벗고 있더라도 오히려 가려울테지. 땀기운이 물씬하고 끈적끈적한 기운이 풀풀나는 가운데, 떨어지지도 않고 붙어있지도 않은 옷과 살의 사이, 바로 거기서 이는 생기느니라.”
昔黃政丞自公而歸, 其女迎謂曰: “大人知蝨乎? 蝨奚生? 生於衣歟?” 曰: “然.” 女笑曰: “我固勝矣.” 婦請曰: "蝨生於肌歟?” 曰: “是也.” 婦笑曰: “舅氏是我.” 夫人怒曰: “孰謂大監智, 訟而兩是?” 政丞莞爾而笑曰: “女與婦來. 夫蝨非肌不化, 非衣不傅. 故兩言皆是也. 雖然衣在籠中, 亦有蝨焉, 使汝裸裎, 猶將癢焉. 汗氣蒸蒸, 糊氣蟲蟲, 不離不襯, 衣膚之間.”

임백호林白湖가 막 말을 타려는데 하인이 나서며 말하기를, 
“나으리! 취하셨습니다요. 가죽신과 나막신을 한짝씩 신으셨네요.”
하자, 백호가 꾸짖으며 말하였다. 
“길 오른편에 있는 자는 날더러 가죽신을 신었다 할 터이고, 길 왼편에 있는 자는 날더러 나막신을 신었다 할 터이니, 내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林白湖將乘馬, 僕夫進曰: “夫子醉矣. 隻履鞾鞋.” 白湖叱曰: “由道而右者, 謂我履鞾, 由道而左者, 謂我履鞋, 我何病哉!” 

이로 말미암아 논하건대, 천하에 보기 쉬운 것에 발만한 것이 없지만, 보는 바가 같지 않게 되면 가죽신인지 나막신인지도 분별하기가 어렵다. 그런 까닭에 참되고 바른 견해는 진실로 옳다 하고 그르다 하는 그 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땀이 이로 변화하는 것 같은 것은 지극히 미묘하여 살피기가 어렵다. 옷과 살의 사이에는 절로 빈 곳이 있어 떨어지지도 않고 붙어있지도 않으며 오른쪽도 아니요 왼쪽도 아니니 누가 그 ‘가운데’를 얻을 수 있겠는가? 
由是論之, 天下之易見者, 莫如足, 而所見者不同, 則鞾鞋難辨矣. 故眞正之見, 固在於是非之中. 如汗之化蝨, 至微而難審. 衣膚之間, 自有其空, 不離不襯, 不右不左, 孰得其中?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을 사랑하여 여룡驪龍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룡도 또한 그 구슬을 가지고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 자패子珮가 이를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내 시집의 이름을 삼을만 하다”하며 마침내 그 시집을 이름지어 《낭환집蜋丸集》이라하고는 내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蜣蜋自愛滾丸, 不羨驪龍之珠. 驪龍亦不以其珠, 笑彼蜋丸. 子珮聞而喜之曰: “是可以名吾詩.” 遂名其集曰蜋丸, 屬余序之.

내가 자패에게 일러 말하였다. 
“옛날에 정령위丁令威가 학이 되어 돌아왔지만 아무도 아는 자가 없었으니, 이 어찌 비단옷 입고 밤길을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태현경太玄經》이 크게 유행했으나 이를 지은 양웅揚雄은 보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장님이 비단옷을 입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 시집을 보고 한결같이 여룡의 구슬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그대의 나막신을 본 것이요, 한결같이 말똥으로 여긴다면 그대의 가죽신을 본 것이리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음은 정령위가 학이 된 것과 같고, 스스로 보지 못함은 양웅이 《태현경》을 지은 것과 한가지이다. 여의주와 말똥을 변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청허선생 뿐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余謂子珮曰: “昔丁令威化鶴而歸, 人無知者. 斯豈非衣繡而夜行乎? 太玄大行, 而子雲不見, 斯豈非瞽者之衣錦乎? 覽斯集, 一以爲龍珠, 則見子之鞋矣, 一以爲蜋丸, 則見子之鞾矣. 人不知猶爲令威之羽毛, 不自見猶爲子雲之太玄. 珠丸之辨, 唯聽虛先生. 在吾何云乎?”


진정지견眞正之見, 즉 참되고 바른 견식見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번에 살펴보려는 〈낭환집서蜋丸集序〉와 〈공작관문고자서孔雀舘文稿自序〉는 바로 이 진정眞正한 견식의 소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연암의 글이 늘 그렇듯 이들 글 또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여러 겹의 비유로 이루어져 있어 글쓴이의 진의를 온전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연암은 먼저 장님의 비단옷과 밤길의 비단옷을 들고 나온다. 비단옷을 입기는 입었는데, 하나는 장님이 입었고 다른 하나는 한밤중에 입었다. 장님의 비단옷은 제가 입기는 했어도 그 때깔이 얼마나 좋은지 정작 그 당사자는 알길이 없어 문제이고, 밤길의 비단옷은 남들이 그 좋은 것을 알아주지 않으니 그것이 병통이 된다. 
그래도 둘 사이에 우열을 가를 수는 없을까? 이렇게 시작된 자무子務와 자혜子惠의 논쟁은 종내 결론을 내지 못한채 청허선생聽虛先生의 판단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청허선생이란 말 그대로 ‘허虛’ 즉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텅빈 것도 들을 수 있는 선생이니, 도가류道家類 우언寓言에 흔히 등장하는 현자賢者이다. 그런데 그 청허선생도 이 문제는 자신이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며 손을 휘휘 내젓고는 판정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오고 만다. 
그리고는 다소 엉뚱하게 연암은 두 개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황희 정승의 이야기와 임백호의 일화가 그것이다. 먼저 황희 정승의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이 이야기는 계집 종끼리 싸우다가 둘이 차례로 와서 하소연하자 둘에게 모두 “네 말이 옳다”고 대답했다는 널리 알려진 황희 정승의 설화를 연암식으로 패러디한 것이다. 조카가 그 곁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어찌 둘다 옳을 수 있느냐고 따지자 황희는 능청스레 “그래, 네 말이 옳다”고 했다는 바로 그 이야기다. 
청허선생이 나는 모른다고 연암에게 미룬 문제는 이것과 저것의 사이를 갈라 분변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연암은 예의 황희 정승 이야기를 패러디하여 이가 과연 살에서 생기는가 아니면 옷에서 생기는가의 문제로 화제를 옮겨왔다. 이는 옷에서 생긴다고 믿는 딸과, 이는 살에서 생긴다고 여기는 며느리를 두고 황희는 둘 다 옳다고 말한다. 그러자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지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그의 부인이 따지고 대든다. 
빙그레 웃으며 하는 황희의 대답은 이러하다. “이는 살의 온기가 없이는 알을 까지 못하고, 옷이 없고는 붙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는 옷과 살의 사이, 떨어진 것도 아니요 딱 붙은 것도 아닌 그 중간에서 생겨나는 것이야. 네 몸에 이가 있는데, 네가 옷을 벗어 걸면 이도 따라서 옷 속에 있게 되지. 그렇다고 이는 옷에서 생겨난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또 반대로 옷을 활활 벗어 던져도 네 머리카락과 네 몸은 이 때문에 근질근질 할 터인데, 그렇다고 이가 살에서 생겨난다고 할 수야 있겠니? 그러니 너희들의 말은 둘다 맞고 또 둘다 틀린 것이야. 내 말을 알겠느냐?”
요컨대 옷과 살의 사이, 그 ‘중간’이 바로 문제의 지점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판단은 언제나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기를 요구한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가치 중립적 판단은 으레 회색분자로 내몰리고 만다. 그러나 복잡한 세상일에는 단정적 가치 판단만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백호白湖 임제林悌는 조선 중기의 쾌남아이다. 그가 평양 부임 길에 길가에 황진이 무덤 곁을 지나게 되었다. 왕명을 받들고 가는 터였음에도 호기에 겨워 기생의 무덤에 술잔을 부어 주며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었난다. 홍안紅顔은 어데 두고 백골白骨만 누었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 하노라”라는 시조 한 수를 지었다가, 임지 부임하기도 전에 파면을 당했다던 풍류 남아다. 
잔치 집에서 거나해진 그가 잘못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나와 말에 올라타려 하자, 하인이 거들고 나선다. “나으리, 신발을 짝짝이로 신으셨습니다요!” “옛끼 이놈! 길 오른편에서 나를 본 자는 저 사람이 가죽신을 신은게지 할 터이고, 길 왼편에서 나를 본 자는 저 이가 나막신을 신었구먼 할 터인데, 짝짝이고 아니고가 무슨 상관이더란 말이냐. 어서 가기나 하자!”
묘한 말씀이다. 그저 걸어 갈 때라면 신발을 짝짝이로 신은 것이 과연 우스꽝스러운 노릇일테지만, 그렇지 않고 이쪽 발과 저쪽 발 사이에 말이 가로 놓이고 보면 짝짝이 신발은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괴상한 논리이다. 사람들은 어느 한쪽의 자기 기준만을 가지고 사실을 판단하므로, 자신이 본 반쪽만으로 으레 반대편도 그러려니 할 것이기에 한 말이다. 
우리의 판단은 늘 이 모양이다. 짝짝이 신발처럼 알아 보기 쉬운 것도 그 사이에 어떤 다른 것이 끼어들기만 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만다. 그렇다면 말 탄 사람의 신발이 짝짝이인지 아닌지를 알아 보려면 어찌 해야 할까? 말의 정면에 서서 보면 금세 알 수가 있다. 너무도 분명한 짝짝이 신발조차도 올바로 볼 줄 모르는 우리네 안목이고 보면, 옷과 살 사이에 붙어사는 눈에 잘 뵈지도 않는 이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뭐라 분명한 판단을 갖기란 더더욱 쉽지가 않다. 과연 그렇다면 떨어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붙어 있는 것도 아니며, 오른쪽이라 할 수도 없고 왼쪽이라 하기도 어려운, 이도 저도 아니면서 막상 아닌 것도 아닌 그 중간 지점은 어디인가? 연암은 진정한 견식은 바로 이러한 시비의 정 ‘가운데’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말똥구리는 더러운 말똥을 사랑스런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정성스레 굴린다. 말똥구리에게 있어 말똥은 여룡이 물고 있는 여의주보다 더 소중하다. 여룡이 여의주와 바꾸자 한들 거들떠 볼 까닭이 없다. 말똥구리에게 여의주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여룡에게는 여의주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 여의주가 있기에 온갖 조화와 신통력이 거기서 나온다. 그렇지만 말똥구리가 여의주를 부러워 않듯, 여룡은 제 여의주를 뻐기지 않는다. 각자 그저 그렇게 제 삶에 편안하게 살아간다. 
여룡의 여의주는 천하에 귀한 물건이 되지만, 말똥구리의 말똥은 천하에 천해 빠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별지는 오직 인간에게만 있다. 그들은 앞서도 보았듯 까마귀는 검으니 더럽고 음흉하며, 해오라비는 희니 깨끗하고 고결하다고 믿는다. 믿기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한 인식을 강요한다. 그들은 어느 하나만을 보고는 전체라고 속단하며, 한가지 척도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 든다. 그래서 이는 옷에서 생긴다고 하고 살에서 생긴다고 하며 내기를 걸고, 저 사람은 나막신이다, 아니다 가죽신이다로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그런가? 
그러자 자패가 기뻐 앞으로 나서며, “선생님! 그 말씀이 참으로 좋습니다. 제 시집 제목을 《낭환집蜋丸集》이라 하겠습니다. 아예 내친 김에 서문까지 써주시지요.” 한다. 여기서 앞서 말한 장님의 비단옷과 밤길의 비단옷 이야기가 사실은 이 《낭환집》의 서문을 쓰기 위한 구실임을 알게 되었다. 
다시 연암의 비유는 계속 이어진다. 정령위는 중국 옛 신선의 이름이다. 그는 신선술을 배워 익혀 마침내 학이 되어 훨훨 날아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8백년만에 인간 세상에 돌아왔으나 세상은 모두 변해 버려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세상에 생존해 있지 않았다. 애석하구나! 정령위는 분명히 8백년을 살았는데, 그것을 증명해 줄 단 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정령위는 자신이 8백살을 살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야 말로 밤길에 비단옷 입은 꼴이 아니겠는가?
양웅이 《태현경》을 지을 때 그의 벗이 그에게 와서 비웃었다. “여보게! 세상은 이제 《주역》도 어렵다고 읽지 않는데 자네의 그 책은 《주역》보다도 몇 배 더 어려우니 그 책을 출판한들 읽을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뒷날 장독대의 덮개로나 쓰이지 않으면 다행일세 그려.” 그런데 막상 그 《태현경》은 양웅이 세상을 뜨자 당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어 이른바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리는 유명한 책이 되었다. 아깝구나! 양웅의 《태현경》은 분명코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정작 양웅 그 자신은 그것을 볼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정녕 장님의 비단옷이 아니던가? 
“여보게, 자패! 자, 누가 자네의 《낭환집》을 읽고서 ‘와! 이것은 여룡의 여의주처럼 주옥같은 작품들이로구먼.’ 했다고 치세. 그렇다면 그자는 자네의 나막신을 본 것일세. 또 ‘에이, 이건 말똥만도 못한 수준 이하의 작품이야.’ 라고 했다고 하세. 그 또한 자네의 가죽신을 본 것일 뿐일세. 거기에 일희일비一喜一悲 할 것이 무에 있겠나? 학이 되어 돌아온 정령위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는데, 양웅의 《태현경》을 어찌 스스로 알 수 있단 말인가? 여의주가 나은지 말똥이 좋은지는 난 도무지 모르겠네 그려. 자네 청허선생께나 가서 여쭈어 보지 그래?” 
애초에 우리의 관심사는 장님의 비단옷과 밤길의 비단옷 사이에 우열을 갈라 따지는 일이었으니, 그 대답은 정령위와 양웅 중 어느 편이 더 나은가를 헤아려 보면 해결 될 수 있을 터이다. 그런데 그것을 청허선생은 “난 몰라! 난 몰라!”했고, 연암은 다시 청허선생에게나 가서 물어보라고 했으니,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답을 어디에서 찾을까? 다음 《장자莊子》〈산목山木〉에 보이는 삽화가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법 싶다. 

장자가 산 가운데로 가다가 가지와 잎새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다. 나무 베는 사람이 그 곁에 멈추고도 베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으니, “쓸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다. 장자가 말하기를, “이 나무는 쓸모 없음을 가지고 그 타고난 수명을 마치게 되었구나”라 하였다. 장자가 산에서 나와 친구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친구가 기뻐 하인에게 거위를 잡아서 삶으라고 명하니, 하인이 묻기를 “한 놈은 잘 울고 한 놈은 울 줄 모르는데 어느 놈을 잡을까요?” 하자, 주인이 말하기를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라고 하였다. 
이튿날 제자가 장자에게 묻기를, “어제 산 속의 나무는 쓸모 없음을 가지고 타고난 수명을 마칠 수 있었고, 오늘 주인의 거위는 쓸모 없음을 가지고 죽었으니, 선생님께서는 장차 어디에 처하시렵니까?”라고 하자, 장자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장차 재材와 불재不材,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사이에 처하려네. 재材와 불재不材의 사이란 옳은 듯 하면서도 그른 것이니 폐단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야. 만약 대저 도덕道德을 타고서 떠다닌다면 그렇지가 않겠지. 기림도 없고 헐뜯음도 없으며, 한 번은 용이 되고 한 번은 뱀이 되어 때와 더불어 함께 변화하면서 오로지 한가지만 하기를 즐기지 않을 것이요, 한 번은 올라가고 한 번은 내려가서 조화로움을 법도로 삼아 만물의 근원에서 떠다니며 노닐어 사물로 사물을 부릴 뿐 사물에 부림당하지 않을 터이니 어찌 폐단이 될 수 있겠는가? 이는 신농神農과 황제黃帝의 법칙일세. 대저 만물萬物의 정情이나 인륜人倫의 전함 같은 것은 그렇지가 않다네. 합하면 떨어지게 마련이고, 이루고 나면 무너지며, 모가 나면 꺾이고, 높으면 말이 있게 되며, 유위有爲하면 공격 당하고, 어질면 도모함을 당하며, 못나면 속임을 당하고 마니, 어찌 폐단 면하기를 기필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너희들은 이를 기억해 두어라! 그것은 오직 도덕道德의 고장에서만 가능한 일임을 말이다.” 

숲 속의 큰 나무는 쓸모 없음으로 인해 제 타고난 수명을 누릴 수 있었고, 친구 집의 거위는 쓸모 없음으로 인해 제 목숨을 잃었다. 둘다 쓸모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이제 그 결과는 반대로 되었다. 혼란스러운 제자가 선생님은 어디에 처하시겠느냐고 하자, 장자는 천연스레 그 ‘가운데’에 처하겠노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우리는 옷과 살의 사이, 혹은 나막신과 가죽신의 중간에서 사물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던 연암의 문답이 기실은 장자의 패러디임을 짐작하게 된다. 그렇다면, 밤길의 비단옷과 장님의 비단옷 사이의 우열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장자식으로 대답하자면 나는 그 중간에 처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재材’와 ‘불재不材’의 사이에 처하겠노라는 장자의 판단은 언제나 또 다른 시비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들은 언제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기를 요구한다. 나막신이냐 가죽신이냐, 밤길의 비단옷이냐 장님의 비단옷이냐, 살이냐 옷이냐, 그도 아니면 정령위이냐 양웅이냐 중 양자택일 할 것을 부단히 강요한다. 어느 것이 나은가? 어느 편에 설까? 합치기 아니면 갈라서기요, 이루기 아니면 무너지기며, 전부가 아니면 전무全無일 뿐이다. 그 중간항은 어디에도 설 데가 없다. 
이런 세상에서 ‘가운데’에 처하겠다는 어중간한 처신은 욕 얻어먹기에 딱 좋을 뿐이다. 그러기에 장자는 “슬프다! 제자야 잘 기억해 두어라. ‘가운데’에 처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는 곳은 오직 세상 어디에도 존재치 않는 ‘도덕지향道德之鄕’에서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연암도 이렇다 할 똑 부러진 대답을 내지 못하고, 다시금 문제를 슬그머니 있지도 않은 청허선생에게로 되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최종적인 대답은 청허선생과 마찬가지로 “난 몰라, 난 몰라!”였던 셈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처해야 할 그 ‘중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러한 가치 판단의 문제에 대해서 다른 시각에서 다룬 글이 바로 〈공작관문고자서孔雀舘文稿自序〉이다. 이글에서 연암은 다시 이명耳鳴과 코골기의 비유를 들고 나온다. 먼저 원문을 읽어 보도록 하자. 

글이란 뜻을 나타내면 그만일 뿐이다. 저 제목에 임해 붓을 잡기만 하면 문득 옛 말을 생각하고, 억지로 경전의 뜻을 찾아 생각을 꾸며 근엄하게 하며 글자마다 무게를 잡는 자는, 비유하자면 화공畵工을 불러 진영眞影을 그리는데 용모를 고쳐서 나가는 것과 같다. 눈동자는 멀뚱멀뚱 구르지 않고, 옷의 무늬는 닦은 듯 말끔하여 평상의 태도를 잃고 보면 비록 훌륭한 화공이라 해도 그 참 모습을 그려내기가 어렵다. 글을 하는 것도 또한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말은 반드시 거창할 것이 없으니, 도道는 호리毫釐에서 나뉘어 진다. 말할 만한 것이라면 기왓장 자갈돌이라 해서 어찌 버리겠는가. 그런 까닭에 도올檮杌은 흉악한 짐승인데 초나라 역사책이 이름으로 취하였고, 사람을 몽둥이로 쳐서 묻어 죽이는 자가 극악한 도적임에도 사마천과 반고班固는 이에 대해 서술하였다. 글을 하는 자는 다만 그 참됨을 추구할 뿐이다. 
文以寫意, 則止而已矣. 彼臨題操毫, 忽思古語, 强覓經旨, 假意謹嚴, 逐字矜莊者, 譬如招工寫眞, 更容貌而前也. 目視不轉, 衣紋如拭, 失其常度, 雖良畵史, 難得其眞. 爲文者, 亦何異於是哉. 語不必大, 道分毫釐, 所可道也, 瓦礫何棄? 故檮杌惡獸, 楚史取名, 椎埋劇盜, 遷固是敍. 爲文者, 惟其眞而已矣.

이로 볼진대 얻고 잃음은 내게 달려 있지만 기리고 헐뜯음은 남에게 있다. 비유하자면 이명耳鳴이나 코골기와 같다. 어린아이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그 귀가 갑자기 우는지라 놀라 기뻐하며 가만히 옆의 아이에게 말하였다. “얘! 너 이 소리를 들어 보아라. 내 귀가 우는구나. 피리를 부는 듯, 생황을 부는 듯, 마치 별처럼 동그랗게 들려!” 옆의 아이가 귀를 맞대고 귀기울여 보았지만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명이 난 아이는 답답해 소리지르며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以是觀之, 得失在我, 毁譽在人. 譬如耳鳴而鼻鼾. 小兒嬉庭, 其耳忽鳴, 啞然而喜, 潛謂隣兒曰: “爾聽此聲. 我耳其嚶. 奏鞸吹笙, 其團如星.” 隣兒傾耳相接, 竟無所聽, 閔然叫號, 恨人之不知也. 

일찍이 시골 사람과 함께 자는데,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 것이 게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탄식하거나 한숨 쉬는 소리 같기도 하며, 불을 부는 듯, 솥이 부글부글 끓는 듯, 빈 수레가 덜그덕거리는 듯하였다. 들이마실 때에는 톱을 켜는 것만 같고, 내쉴 때에는 돼지가 꽥꽥거리는 듯하였다. 남이 흔들어 깨우자 발끈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내가 언제 코를 골았는가?”하는 것이었다. 
嘗與鄕人宿, 鼾息磊磊, 如哇如嘯, 如嘆如噓, 如吹火, 如鼎之沸, 如空車之頓轍, 引者鋸, 吼噴者豕狗, 被人提醒, 勃然而怒曰: “我無是矣.”

아아! 자기가 혼자 아는 것은 언제나 남이 알아주지 않아 걱정이고,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은 남이 먼저 앎을 미워한다. 어찌 다만 코와 귀에만 이같은 병통이 있겠는가? 문장 또한 이보다 심함이 있을 뿐이다. 이명은 병인데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하니 하물며 그 병 아닌 것임에랴! 코골기는 병이 아닌데도 남이 일깨워 주는 것에 성을 내니, 하물며 그 병임에랴! 그러므로 이 책을 보는 자가 기왓장 자갈돌이라 해서 버리지 않는다면 화공畵工의 번지는 먹에서 흉악한 도적의 뻗친 수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명을 듣지 않고 내 코골기를 깨닫는다면 작가의 뜻에 거의 가까워 질 것이다. 
嗟乎! 己所獨知者, 常患人之不知, 已所未悟者, 惡人先覺. 豈獨鼻耳有是病哉! 文章亦有甚焉耳. 耳鳴病也, 閔人之不知, 況其不病者乎! 鼻鼾非病也, 怒人之提醒, 況其病者乎! 故覽斯卷者, 不棄瓦礫, 則畵史之渲墨, 可得劇盜之突면. 毋聽耳鳴, 醒我鼻鼾, 則庶乎作者之意也.

글은 어떻게 써야 할까? 글이란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쓴다. 그런데 사람들은 붓만 잡으면 내 생각을 어찌해야 남에게 오해없이 충분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고, 어찌하면 좀더 멋있게 폼나게 쓸 수 있을까 하는 궁리만 한다. 예컨대 초상화를 그리겠다면서 잔뜩 분장하여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그림을 그리게 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치 나무 인형처럼 깎은 듯이 앉아서 근엄한 폼을 잡았지만, 막상 그려 놓고 나니 그것은 내가 아니라 완전히 딴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렇듯이 여기서 베껴오고 저기서 훔쳐와서 이리 저리 얽어 놓고 보니, 글은 글인데 내 말은 하나도 없는 우스꽝스러운 글이 되고 말았다. 
글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은 멋 있느냐 멋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글 속에 진정眞情이 담겼느냐 담기지 않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도올檮杌은 흉악한 짐승의 이름이다. 그런데 초나라 역사 책은 그 제목을 이 흉악한 짐승의 이름으로 붙였다. 왜 그랬을까?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 산채로 땅에 파묻는 극악한 도적의 이야기를 사마천이나 반고와 같은 역사가들은 왜 기록에 남겼을까? 그것은 그 이야기가 고상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깊이 새겨야 할 삶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연암은 글이란 뜻을 나타내면 그만이라고 하고 나서, 다시 글을 짓는다는 것은 오직 ‘진眞’을 추구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하여 첫단락을 맺고 있다. 
이어서 연암은 이명耳鳴, 즉 귀울음과 코골기의 비유를 다시 들고 나온다. 비유에 들어가기에 앞서, 전제로 내건 것은 ‘득실재아得失在我, 훼예재인毁譽在人’이다. 얻고 잃음은 내게 달려 있고, 그 결과를 두고 좋으니 나쁘니하며 기리고 헐뜯는 것은 남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내가 마음에 차는 것은 남들이 헐뜯고, 내가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을 또 남들은 좋다고 칭찬한다. 내 마음에 차는 것이 남의 눈에도 차 보이면 좀 좋을까? 그러나 내 생각과 남의 생각은 같지 않게 마련이어서 우리의 판단은 항상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의 득실得失일까? 아니면 남의 훼예毁譽일까? 나의 득실이 우선 중요하지만 그 판단이 잘못될 수 있기에 문제이고, 남의 훼예를 무시할 수 없지만 그것에 끌려 다닐 수만은 없기에 또 문제가 된다. 
이명은 나는 듣지만 다른 사람은 결코 들을 수가 없다. 코골기는 다른 사람은 다 들어도 정작 나는 듣지 못한다. 그럴진대 이명이 밤길에 비단옷이요, 정령위의 불로장생이라면, 코골기는 장님의 비단옷이요, 양웅의 《태현경》이라고 할 만하다. 내 귀에서 나는 이명을 남들이 듣지 못한다고 안타까워 하는 꼬마는 밤길에 비단옷을 입고 가며 그 옷입은 자랑을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며, 자신이 800살 먹은 사실을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아 속상해 하는 정령위일 뿐이다. 나의 코고는 소리를 남이 먼저 알았다고 해서 화를 발칵 내는 시골 사람은 비단옷 입은 장님이거나, 살아 생전 좋은 날이라곤 보지 못한 양웅의 안쓰러움 쯤이 될 터이다. 
그런데, 정작 남이 안 알아준다고 화를 내는 이명이 사실은 병증의 결과이며, 남이 먼저 알았다고 성을 내는 코골기가 사실은 병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좋다고 여기는데, 남들이 여기에 동의해 주질 않으니 나는 화가 난다. 내 판단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전혀 고려에 두지 않는다. 반대로 남들이 내게 이것이 잘못되었다 하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해도 나는 화가 난다. 그 지적이 정말 옳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오직 ‘참’을 추구하는 것일 뿐이다. 그 ‘참’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추하든 악하든 나는 가리지 않겠다. 구슬과 옥이라 해도 ‘참’이 아니라면 나는 버릴 것이고, 자갈돌 기왓장이라 해도 그것이 ‘참’일진대 나는 그것을 추구하리라. 다른 사람이 그것을 말똥구리의 말똥이라고 비웃어도 상관치 않을 것이고, 여룡의 여의주라고 추켜 세운다 해도 기고만장하지 않으리라. 우리의 ‘진정지견眞正之見’은 내 이명에 현혹되지 아니하고, 내 코골기를 직시하는 데서 마련될 수 있음을 나는 믿는다. ‘참’은 바로 그 지점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내가 서 있을 곳은 어디인가? 이명과 코골기의 ‘사이’, 이것과 저것의 ‘중간’ 지점일 뿐이다. 이것은 결코 중용의 미덕을 두둔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곳이 구체적으로 과연 어디에 있느냐고 누가 내게 재차 묻는다면 나는 ‘도덕지향道德之鄕’에 가서 청허선생聽虛先生에게나 물어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으리라. 


1. 
세상 사람들의 분별함이란 한계가 있다. 결국 내가 가진 무언가는 코골이 같을 수도, 이명같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잘못되었으나 스스로 알지 못하고 남들이 먼저 알아채거나, 
내가 안좋음을 알고 있으나 남들이 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득실재아得失在我, 훼예재인毁譽在人’이다. 얻고 잃음은 나에게 있고, 망치고 어여뻐함은 사람들에게 있다.

이 말이 긴 글의 중심을 관통하는 구절이 아닐까 한다. 


결국 내가 스스로를 틀림없이 알고, 남들이 어떻게 할 지를 알 수 있는 지혜가 있지 않으면...
외나무다리 위에서 이쪽으로도 가지 못하고, 저쪽으로도 가지 못하는 꼴을 면치 못하리라. 

여기서 벗어나려거든 그런 사람이 되든지,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과 역량이 있어야 할 것이다. 
둘 다 삶에서 아주 어려운 위치가 아닐 수 없다. 


그 경지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스스로 끝없이 참을 얻고자 노력하고, 

자신을 감추거나 남들이 범하지 못하도록 할 따름일 것이다. 






Posted by 청공(靑空)
동양철학2015. 6. 12. 02:59

출처: 정민교수님의 '옛사람 내면풍경' (http://jungmin.hanyang.ac.kr/)

까마귀의 날갯빛

菱洋詩集序 


통달한 사람은 괴이한 바가 없지만 속인은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고 보니 괴이한 것도 많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통달한 사람이라 해서 어찌 사물마다 눈으로 직접 보았겠는가? 
하나를 들으면 눈 앞에 열 가지가 떠오르고, 열을 보면 마음에서 백 가지가 베풀어져, 천 가지 괴이함과 만 가지 기이함이 도로 사물에 부쳐져서 자기와는 간여함이 없다. 때문에 마음은 한가로와 여유가 있고 응수함이 다함이 없다. 
그러나 본 바가 적은 자는 백로를 가지고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가지고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사물은 절로 괴이할 것이 없건만 자기가 공연히 화를 내고, 한 가지만 같지 않아도 온통 만물을 의심한다. 
達士無所怪, 俗人多所疑. 所謂少所見而多所怪也. 夫豈達士者, 逐物而目覩哉. 聞一則形十於目, 見十則設百於心, 千怪萬奇, 還寄於物, 而己無與焉. 故心閒有餘, 應酬無窮. 所見少者, 以鷺嗤烏, 以鳧危鶴. 物自無怪, 己迺生嗔, 一事不同, 都誣萬物.

아! 저 까마귀를 보면 깃털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그러나 홀연 유금乳金 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석록石綠 빛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하더니 비췻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또한 괜찮을 것이다. 저가 본디 정해진 빛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어찌 그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리오.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 버린다. 
噫! 瞻彼烏矣, 莫黑其羽. 忽暈乳金, 復耀石綠, 日映之而騰紫, 目閃閃而轉翠. 然則吾雖謂之蒼烏, 可也, 復謂之赤烏, 亦可也. 彼旣本無定色, 而我乃以目先定. 奚特定於其目? 不覩而先定於其心. 

아! 까마귀를 검은 빛에 가두었으면 충분한데도, 다시금 까마귀를 천하의 온갖 빛깔에다가 가두었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검다. 그러나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르고 붉은 것이 그 빛깔[色] 가운데 깃든 빛[光]인 줄을 알겠는가? 검은 것[黑]을 일러 어둡다[闇]고 하는 자는 단지 까마귀를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아니라 검은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물은 검기[玄] 때문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칠[漆]은 검은[黑] 까닭에 능히 거울이 될 수가 있다. 이런 까닭에 빛깔 있는 것 치고 빛이 있지 않는 것이 없고, 형상[形] 있는 것에 태態가 없는 것은 없다. 
噫! 錮烏於黑足矣, 迺復以烏錮天下之衆色. 烏果黑矣, 誰復知所謂蒼赤乃色中之光耶? 謂黑爲闇者, 非但不識烏, 竝黑而不知也. 何則? 水玄故能照, 漆黑故能鑑. 是故有色者莫不有光, 有形者莫不有態. 

미인을 보면 시를 알 수가 있다. 그녀가 고개를 숙임은 부끄러운 것이다. 턱을 괸 것은 한스러움을 나타낸다. 홀로 서 있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눈썹을 찌푸림은 근심스러운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림이 있을 때에는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바라는 바가 있을 때는 파초 아래 서 있는 모습으로 보여준다. 
만약 그 서 있는 모습이 재계齋戒한 것 같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빚어놓은 것 같지 않다고 나무란다면, 이것은 양귀비가 이빨이 아파 찌푸림을 나무라는 격이요, 번희樊姬가 쪽진 머리를 감싸 쥠을 못하게 하는 격이며,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의 아름다움을 야단하고, 손뼉치며 추는 춤의 경쾌하고 빠름을 꾸짖는 격이라 하겠다. 
觀乎美人, 可以知詩矣. 彼低頭, 見其羞也; 支頤, 見其恨也; 獨立, 見其思也; 顰眉, 見其愁也; 有所待也, 見其立欄干下; 有所望也, 見其立芭蕉下. 若責其立不如齋, 坐不如塑, 則是罵楊妃之病齒, 而禁樊姬之擁髻也, 譏蓮步之妖妙, 而叱掌舞之輕儇也. 

내 조카 종선宗善은 자가 계지繼之인데 시에 능하다. 한가지 법도에만 얽매이지 아니하여 온갖 체를 두루 갖추었으니, 우뚝히 동방의 대가가 된다. 성당盛唐의 시인가 싶어 보면 어느새 한위漢魏의 시가 되고 또 송명宋明의 시가 된다. 겨우 송명인가 싶어 보면 다시금 성당으로 돌아가 있다. 
아아! 세상 사람들이 까마귀를 비웃고 학을 위태롭게 여김이 또한 너무 심하도다. 그러나 계지의 동산에는 까마귀가 자줏빛도 되었다가 비췻빛도 된다. 세상 사람들은 미인을 재계한 듯 빚어놓은 듯 만들고 싶어하지만 손뼉치며 추는 춤과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는 날로 경쾌해지고 더 아름다워 질 터이고, 틀어올린 머리와 아픈 이빨은 모두 나름대로의 태가 있는 법이다. 그 성내고 노함이 날로 심해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구나. 
세상에는 통달한 선비는 적고 속인만 많다. 그럴진대 침묵하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으나, 그런데도 말을 그만 둘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일까? 아! 연암노인은 연상각烟湘閣에서 쓰노라. 
余侄宗善字繼之, 工於詩, 不纏一法, 百體俱該, 蔚然爲東方大家. 視爲盛唐, 則忽焉漢魏, 而忽焉宋明. 纔謂宋明, 復有盛唐. 嗚呼! 世人之嗤烏危鶴, 亦已甚矣. 而繼之之園, 烏忽紫忽翠. 世人之欲齋塑美人, 而掌舞蓮步, 日益輕妙, 擁髻病齒, 俱各有態. 無惑乎其嗔怒之日滋也. 世之達士少而俗人衆, 則黙而不言, 可也. 然言之不休, 何也? 噫! 燕岩老人書于烟湘閣.


달사達士와 속인의 차이를 어디에서 찾을까? 처음 보는 어떤 물건이나 경험해보지 않았던 어떤 일을 그 앞에 두어 보면 금세 구별할 수가 있다. 달사는 이미 익숙히 알았던 일이기라도 한듯이 침착하게 당황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속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들은 도대체 자기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을 받아들일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처음 보기는 둘다 마찬가진데 한쪽은 속수무책으로 당황하여 화를 내고, 다른 한쪽은 태연자약 능수능란하게 처리해 버린다. 왜 그럴까? 
달사란 어떤 사람인가?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를 들으면 이미 그의 눈 앞에는 그와 관련된 열 가지 형상이 떠오른다. 그가 들은 것은 하나인데 그는 벌써 열 가지를 알아버린다. 열을 보면 마음 속에서는 이미 백 가지 일이 펼쳐진다. 세상의 그 많은 신기하고 괴이하고 알 수 없는 일들도 그의 귀와 눈을 거쳐가면 어느새 평범하고 익숙한 사물로 변해 버린다. 그는 자신의 이목만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사물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한다. 그의 귀와 눈, 그의 마음은 단지 이 사물과 저 사물을 연결지워주는 매개자의 역할만을 기쁘게 감당한다. 그러기에 어떤 난처한 상황도 그는 당황스럽지가 않고, 어떤 복잡한 문제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 그런 그를 나는 달사, 즉 통달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속인은 그렇지가 않다. 그는 자기가 아는 세계를 통해서만 창밖의 세계를 이해하려든다. 그는 사물로써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아我의 집착을 우선하여 사물을 재려든다. 백로의 고결을 높이 치다 보니 까마귀의 더러움을 비웃는다. 오리의 짧은 다리만 보다가 학의 긴 다리를 보면 위태롭기 그지 없다. 그들은 학의 긴 다리를 오리처럼 짧게 해야만 마음이 놓인다. 검은 까마귀의 깃털을 백로의 그것처럼 만들어 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새울세라
청강淸江에 조히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검은 까마귀가 무슨 잘못이 있던가? 외다리로 고고히 서 있는 해오라비, 그 청순한 고결을 사람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정작 그는 지금 주린 제 뱃속을 채우려고 물 속의 고기를 한껏 노리고 있는 중이다. 까마귀의 반포지은反哺之恩은 어떨까? 늙은 제 어미를 위해 먹이를 토해내는 그 갸륵한 마음도 같이 욕을 해야할까? 까마귀는 검은 날갯빛을 하고도 제 삶을 불편함 없이 잘 살아간다. 그것을 보고 불편한 것은 정작 까마귀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것을 보고 행복한 것은 사실 해오라비가 아니라 사람이다. 왜 까마귀를 더럽다 하는가? 해오라비가 고고할 것은 또 무엇인가? 왜 내가 알고 있는 사실, 내가 믿고 있는 가치만을 고집하는가? 왜 그것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욕하는가? 
까마귀의 날갯빛은 정말 검을까? 아니 그보다 검은 것은 정말 나쁜 것일까? 가만히 보면 까마귀의 날개 속에는 갖가지의 빛깔이 감춰져 있다. 유금빛으로 무리지다가 석록빛으로 반짝이고, 햇빛 속에서는 자줏빛도 떠오른다. 자세히 보면 비췻빛도 있구나. 우리가 검다고만 믿어온 그 깃털 속에 이렇듯 다양한 빛깔이 들어 있었구나. 비췻빛 까마귀였다면 우리가 그렇게 미워했을까? 푸른 까마귀라면 그렇게 경멸했을까? 햇살의 프리즘에 따라 바뀌는 까마귀의 날갯빛을 우리는 거부하고 있었구나. 까마귀는 검다. 까마귀는 검다. 검은 것은 더럽다. 더러운 것은 지저분하다. 지저분한 것은 음험하다. 까마귀는 지저분하다. 까마귀는 음험하다. 가까이 가면 물드니 백로야 가지마라. 
한 스킨 스쿠버가 깊은 바다에서 작살로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 피가 초록빛이었다. 하도 신기해 자랑하려고 서둘러 물 위로 올라오니 그저 보통의 붉은 피였다. 햇빛의 장난에 깜빡 속은 것이리라. 물고기의 피는 붉은 색인가? 아니면 초록색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는 언제나 불변인가? 변화하는 것은 진리가 아닌가? 피는 붉다. 까마귀는 더럽다. 속인은 모든 판단을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러기에 깊은 바다 속에서 초록색으로 보이는 피의 빛깔이 신기하고, 검은 빛 속에 언뜻언뜻 떠오르는 석록빛을 인정할 수가 없다. 까마귀는 저대로 자유로운데 공연히 제가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른다. 온 세상 사람들을 해오라비로 만들어야만 제 사명이 다할 줄로 생각한다. 그래서 남을 못살게 굴고, 비난하고 강요한다. 
그리고 나서 연암은 비로소 본론을 꺼낸다. 그가 제기하는 문제는 색色과 광光, 형形과 태態의 관계이다. 색깔 속에는 스펙트럼이 빚어내는 다양한 광채가 있다. 하나의 꼴 속에는 수없이 많은 태가 깃들어 있다. 속인과 달사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속인은 색과 형만 가지고 사물을 판단한다. 그러나 달사는 그 속에 깃든 광과 태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이편에서 괴이쩍은 일이 저쪽에서는 당연한 것이 되고, 이편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저쪽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일로 된다. 
검다는 것만 가지고 다시 살펴 보자. 검은 색에도 여러 가지 광光이 깃들어 있다. 검다는 것이 환기하는 의미에는 어둡다, 시커멓다, 더럽다, 음험하다, 현묘하다, 마음씨가 나쁘다 등등의 다양한 층위가 있다. 까마귀는 더럽다고 할 수 있다면, 까마귀는 현묘하다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속인은 그럴 수가 없다. 다시 연암은 검다는 말을 흑黑·암闇·현玄·칠漆 등으로 분절한다. 검다고 사물을 다 비추지는 못한다. 옻칠만이 사물을 비출 수 있고, 수면의 검은[玄] 빛 만이 사물을 비출 수 있다. 검은 옷은 사물을 비추지 못하고, 어둠도 사물을 비추지는 못한다. 단지 검다는 말 속에도 뜻밖에 이렇듯 다양한 의미망이 존재하고 있다. ‘검다’라는 단어를 선입견을 가지고 보지 말아라. 그 색에 현혹되지 말고, 그 빛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꼴 속에는 다양한 태가 깃들어 있다. 나는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 기쁠 때 웃는 나와 분노로 성내는 나는 다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아닌가? 아버지로서 근엄하게 야단치는 내가 있고, 자식으로서 공손히 순종하는 내가 있다. 교실에서 강의할 때의 나와, 스승 앞에서 가르침을 청할 때의 나는 내가 보기에도 판이하다. 이럴 때 나는 나인가? 그 다양한 태態를 나는 인정하며 살아간다. 그것을 융은 퍼소나persona라 이름짓고, 시인은 시적 화자라 부른다. 내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나,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좀전과 지금이 같지 않은 나, 그 많은 나들을 나는 나라고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속인은 싸늘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 속에서 진정한 단 하나의 나, 나다운 나, 완성된 나를 찾아야만 할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제 연암은 형形과 태態의 관계를 부연하기 위해 미인을 끌어들인다. 그림 속에 그려진 미인은 다양한 동작을 취하고 있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구나. 그녀는 지금 부끄러운 것이다. 턱을 괴고 넋을 놓고 있구나. “내 님은 누구실까? 어디 계실까?” 그녀의 마음은 이런 것이었을게다. 달빛 아래 홀로 선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멀리 떠나간 님을 향한 그리움을 읽는다. 아! 그녀가 눈썹을 찡그리고 있다. 알지 못할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그늘을 드리운 것이다. 높은 난간에 올라 먼데를 바라보는 그 뜻은 님이 이제나 저제나 오실까 해서임을 나는 안다. 파초 그늘 아래서 위를 올려다 보는 그녀. 그녀는 무언가 잘 이뤄지지 않는 바램을 지니고 있구나. 
만약 그 많은 미인도의 모습이 한결같이 금세 깨끗이 재계하고 나온 듯 하고, 흙으로 빚어놓은 조각처럼 단정해야만 한다고 우긴다면, 나는 그런 사람과 더불어 그림을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 미인은 단정해야 한다. 덕성이 넘쳐흘러야 한다. 서 있는 것도 앉아 있는 것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그런 미인을 나는 진흙으로 빚은 미인이라고 부르련다. 형形만 있고 태態는 없는 미인은 미인이 아니다. 분칠한 아름다움만으로는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예쁘고 화려한 옷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자태가 있어야 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태에서 나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반대로 우리는 그림 속 미인의 자태를 보고 그녀의 속마음을 읽어낼 수가 있다. 하나의 몸짓 속에 서로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청나라 때 장조張潮는 《유몽영幽夢影》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습이 추한대도 볼 만한 사람이 있고, 비록 추하지 않지만 볼 만한 구석이라곤 없는 사람이 있다. 글이 문리는 통하지 않아도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있고, 비록 문리는 통하지만 지극히 혐오스러운 것도 있다. 이것은 천박한 사람에게는 쉽게 알려주지 못하는 이치이다. 
貌有醜而可觀者, 有雖不醜而不足觀者; 文有不通而可愛者, 有雖通而極可厭者. 此未易與淺人道也. 

사람들은 형만 보고 태는 보지 않는다. 겉모습에만 현혹된다. 그래서 언제나 허전하다. 늘 속고만 산다. 치통을 앓아 뺨에 한 손을 가볍게 대고서 살짝 찌푸린 양귀비의 표정은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슬픈 이야기에 젖어 촛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쪽진 머리를 매만지는 번희樊姬, 그녀의 눈가를 촉촉히 적시는 눈물은 얼마나 고혹적이었을까? 그녀에게 왜 빚어 놓은 듯이 단정하게 앉아 있지 않느냐고 나무랄 것인가? 그녀더러 어째서 얌전히 머리를 길게 늘이지 않느냐고 야단할 것인가? 그래도 화가들은 굳이 ‘양비병치도楊妃病齒圖’를 즐겨 그리고, 연극 작가들은 번희의 쪽진 머리 매만지던 일을 소재로 희곡을 썼다(청나라 서위舒位는 《번희옹계樊姬擁髻》라는 희곡을 남겼다). 사뿐사뿐 걸어가는 여인의 요염한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점잖치 못하다고 무조건 나무랄 것인가? 장중한 아악雅樂의 정무正舞만을 옳다하여 빠른 박자로 손뼉치며 휘휘 돌아가는 북방 호무胡舞의 날렵하고 경쾌한 춤사위를 거부할 것인가? 
연암은 이제 글을 마무리 한다. 내 조카 종선의 시 속에는 다양한 광光과 태態가 담겨 있다. 따라서 한가지 색色과 한가지 태態만을 기호하는 자들은 그의 시를 비웃으리라. 그러나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를 동방의 대가라고 부르고자 한다. 해오라비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가지고 학을 위태롭게 여기는 자들은 이를 하찮게 여겨 분노하고 성낼테지만, 나는 그의 자줏빛 까마귀와 비췻빛 까마귀를 사랑한다. 세상 사람들은 판에 박은 미인의 모습만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정작 그들이 사랑하는 미인은 피가 돌고 살이 부드러운 미인이 아니라, 진열장의 마네킹일 뿐이다. 
나는 언제 들어도 트롯트 가요가 좋은데 TV에서는 허구 헌 날 랩 송과 댄스 음악만을 틀어대고 있으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주변 사람에게 저것도 노래냐고,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저 지경이냐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다. 배꼽티는 날로 노출이 심해질 것이고, 청소년 문제는 갈수록 점입가경일 것이다. 언제나 세상은 곧 내일 망할 것 같은 말세였었다. 젊은이들은 항상 버르장머리가 없었다. 연암의 그때도 그랬고, 지금의 여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아직 세상이 망했다는 소식이 들리질 않고, 젊은이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건강하게 성장해간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색色만 보고 광光은 외면하고, 형形만 볼뿐 태態는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데 있다. 연암은 《열하일기》 중 〈망양록亡羊錄〉에서 이에 대해 다시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근세의 잡극 중에 〈서상기西廂記〉를 공연하면 지루해서 졸음이 오는데, 〈모란정牧丹亭〉을 공연하면 정신이 번쩍 들어 귀 기울여 듣는다. 이것은 비록 여항의 천한 일이지만 백성들의 습속과 취향이라는 것이 때에 따라 옮기어 바뀐다는 것을 증거하기에 충분하다. 사대부가 옛 음악을 회복하려고 마음 먹고서 가락과 곡조가 바뀐 것은 모르고서 이에 갑자기 쇠북과 피리를 부수고 고쳐서 원래의 소리를 찾고자 한다면 사람과 악기가 모두 없어지기에 이를 것이다. 이것이 어찌 화살을 따라가서 과녁을 그리고, 술 취함을 미워하면서 억지로 술 마시게 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如近世雜劇, 演西廂記, 則捲焉思睡; 演牧丹亭, 則洒然改聽. 此雖閭巷鄙事, 足驗民俗趣尙, 隨時遷改. 士大夫思復古樂, 不知改腔易調, 乃遽毁鍾改管, 欲尋元聲, 以至人器俱亡. 是何異於隨矢畵鵠, 惡醉强酒乎?

정곡을 꿰뚫는 명궁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고 화살이 맞은 곳마다 쫓아가서 과녁을 설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화살이 과녁을 찾아가야지, 과녁이 화살을 찾아가는 법이 없다. 표적이 바뀌면 조준이 달라지듯, 시대가 바뀌면 취향도 바뀐다. 내가 쏘는 화살만은 반드시 과녁을 뚫어야 된다는 법이 없다. 여기서 억지가 생기고 무리가 따른다. 이미 달라진 옛 음악을 이제와 복원하려 한들 가능키나 하겠으며, 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원래의 소리란 없다. 당시에는 그것도 변화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이다. 있지도 않은 원래의 소리 때문에 지금 귀에 익은 소리를 버릴 수는 없다. 술 취해 비틀대는 꼴이 보기 싫거든 아예 술을 멀리할 일이다. 그런데 왜 싫은 술을 억지로 마시고 싫다는 술을 굳이 권하는가? 
아! 세상에는 달사를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속물들의 속물 근성만 힘을 발휘하는 세상이다. 차라리 입을 닫고 침묵하리라. 그러면 그들의 노여움을 모면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입을 열어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 그러나 막상 말하고 나니 답답하구나. 시인들이여! 그대들이 사물을 바라보는 형편은 어떠한가?


1. 

하나의 색(色) 속에 깃들어 있는 온갖 빛깔(光)을 볼 수 있고, 
하나의 형상(形) 안에서 풀어져나가는 무수한 태(態)를 보아야 한다. 

제대로 본 바가 적은 사람은 세상 온갖 것들을 자기가 가진 부족함으로 보려하니 
어그러지고 곡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통달한 사람은 언제나 정곡을 꿰뚫는다.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사물을 사물로서 볼 수 있고, 
사건을 사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소인들은 자기를 통해 세상을 보지만, 도인은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눈 뜨고도 눈 감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태에서 나오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색과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묘한 법을 볼 수 있으리라. 


"모습이 추한대도 볼만한 사람이 있고, 비록 추하지는 않지만 볼만한 구석이 없는 사람이 있다."



Posted by 청공(靑空)
동양철학2015. 6. 10. 19:01

출처: 정민교수님의 '옛사람 내면풍경' (http://jungmin.hanyang.ac.kr/)


이미지는 살아 있다, 코끼리의 기호학

象記

장차 괴상하고 진기하고 대단하고 어마어마한 것을 보려거든 먼저 선무문宣武門 안으로 가서 코끼리 우리를 살피면 될 것이다. 내가 황성皇城에서 코끼리 16마리를 보았으나, 모두 쇠로 만든 족쇄로 발을 묶어 두어 그 움직이는 것은 보지못하였었다. 이제 열하熱河 행궁行宮의 서편에서 코끼리 두 마리를 보매, 온몸을 꿈틀대며 움직이는데 마치 비바람이 지나가는 듯 하였다. 
將爲怪特譎詭恢奇鉅偉之觀, 先之宣武門內, 觀于象房可也. 余於皇城, 見象十六, 而皆鐵鎖繫足, 未見其行動. 今見兩象於熱河行宮西, 一身蠕動, 行如風雨. 

내가 일찍이 새벽에 동해 가를 가다가 파도 위에 말같은 것이 수도 없이 많이 서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모두 봉긋하니 집과 같아 물고기인지 짐승인지 알지 못하겠길래 해 뜨기를 기다려 자세히 보려 했더니, 막상 해가 바다 위로 떠오르려 하자 파도 위에 말처럼 섰던 것들은 하마 벌써 바다 속으로 숨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제 열 걸음 밖에서 코끼리를 보고 있는데도 오히려 동해에서의 생각이 떠올랐다. 
余嘗曉行東海上, 見波上馬立者無數. 皆穹然如屋, 弗知是魚是獸, 欲俟日出, 暢見之, 日方浴海, 而波上馬立者, 已匿海中矣. 今見象於十步之外, 而猶作東海想. 

그 생김새가 몸뚱이는 소인데 꼬리는 나귀 같고, 낙타 무릎에다 범의 발굽을 하고 있다. 털은 짧고 회색으로, 모습은 어질게 생겼고 소리는 구슬프다. 귀는 마치 구름을 드리운 듯 하고, 눈은 초승달 처럼 생겼다. 양쪽의 어금니는 크기가 두 아람이나 되고, 길이는 한 자 남짓이다. 코가 어금니보다 더 길어서 구부리고 펴는 것은 자벌레만 같고, 두르르 말고 굽히는 것은 굼벵이 같다. 그 끝은 누에 꽁무니처럼 생겼는데, 마치 족집게처럼 물건을 끼워가지고는 말아서 입에다 넣는다. 
其爲物也, 牛身驢尾, 駝膝虎蹄. 淺毛灰色, 仁形悲聲. 耳若垂雲, 眼如初月. 兩牙之大二圍, 其長丈餘. 鼻長於牙, 屈伸如蠖, 卷曲如蠐. 其端如蠶尾, 挾物如鑷, 卷而納之口. 

혹 코를 주둥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어, 다시금 코끼리의 코가 있는 곳을 찾기도 하니, 대개 그 코가 이렇게 길 줄은 생각지도 못하는 것이다. 간혹 코끼리는 다리가 다섯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혹은 코끼리 눈이 쥐눈과 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 온 마음이 코와 어금니 사이로만 쏠려서 그 온 몸뚱이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을 좇다 보니 이렇듯 앞뒤가 안맞는 비유가 있게 된 것이다. 대개 코끼리의 눈은 몹시 가늘어 마치 간사한 사람이 아양을 떨 때 그 눈이 먼저 웃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 어진 성품이 바로 이 눈에 담겨 있다. 
或有認鼻爲喙者, 復覓象鼻所在, 蓋不意其鼻之至斯也. 或有謂象五脚者. 或謂象目如鼠, 蓋情窮於鼻牙之間, 就其通軆之最少者, 有此比擬之不倫. 蓋象眼甚細, 如姦人獻媚, 其眼先笑. 然其仁性在眼.

강희康熙 때에 남해자南海子에 사나운 범 두 마리가 있었다. 오래 되어도 능히 길들이지 못하자, 황제가 노하여 범을 몰아다가 코끼리 우리로 들여보낼 것을 명하였다. 코끼리가 크게 놀라 한 번 그 코를 휘두르매 범 두 마리는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코끼리가 범을 죽일 마음은 없었는데, 냄새 나는 것을 싫어하여 코를 휘두른다는 것이 잘못 맞았던 것이었다. 
康熙時, 南海子有二惡虎. 久而不能馴, 帝怒命驅虎, 納之象房. 象大恐, 一揮其鼻, 而兩虎立斃. 象非有意殺虎也, 惡生臭而揮鼻誤觸也.

아아! 세간의 사물 가운데 겨우 털끝같이 미세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일컫지 않음이 없으나, 하늘이 어찌 일찍이 일일이 이름을 지었겠는가? 형체를 가지고 ‘천天’이라 하고, 성정을 가지고는 ‘건乾’이라 하며, 주재함을 가지고는 ‘제帝’라 하고, 묘용妙用을 가지고서는 ‘신神’이라 하여, 그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이고 일컬어 말하는 것도 몹시 제멋대로이다. 이에 이기理氣로써 화로와 풀무로 삼고, 펼쳐 베품을 가지고 조물造物로 여기니, 이것은 하늘 보기를 교묘한 장인匠人으로 보아 망치질하고 끌질하며, 도끼질과 자귀질 하기를 잠시도 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噫! 世間事物之微, 僅若毫末, 莫非稱天, 天何嘗一一命之哉. 以形軆謂之天, 以性情謂之乾, 以主宰謂之帝, 以妙用謂之神, 號名多方, 稱謂太褻. 乃以理氣爲爐鞴, 播賦爲造物, 是視天爲巧工, 而椎鑿斧斤, 不少間歇也.

그런 까닭에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이 초매草昧, 즉 혼돈을 만들었다. 天造草昧”고 하였는데, 초매라는 것은 그 빛이 검고 그 모습은 흙비가 쏟아지는 듯 하여, 비유하자면 장차 새벽이 오려고는 하나 아직 새벽은 되지 않은 때에 사람과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캄캄하여 흙비 내리는 듯한 가운데에서 하늘이 만들었다는 것이 과연 어떤 물건인지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하겠다. 비유컨데 국수집에서 밀을 갈면 가늘고 굵고 곱고 거친 것이 뒤섞여 땅으로 흩어진다. 대저 멧돌의 공능은 도는데 있을 뿐이니, 애초부터 어찌 일찍이 곱고 거친 것에 뜻이 있었겠는가?
故易曰: “天造草昧”, 草昧者其色皂而其形也霾, 譬如將曉未曉之時, 人物莫辨, 吾未知天於皂霾之中所造者, 果何物也. 麵家磨麥, 細大精粗, 雜然撒地. 夫磨之功, 轉而已, 初何嘗有意於精粗哉? 

그런데도 말하는 자들은 “뿔이 있는 놈에게는 윗니를 주지 않는다”고 하여 마치 사물을 만듦에 모자란 것이라도 있는 듯이 하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감히 묻는다. 
“이빨을 준 것은 누구인가?” 
사람들은 장차 말하리라.
“하늘이 주었다.”
다시 묻는다. 
“하늘이 이빨을 준 것은 장차 이것으로 무엇을 하게 하려한 것인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리라. 
“하늘이 하여금 물건을 씹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묻는다. 
“이로 하여금 왜 물건을 씹게 하는가?”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대저 이치이다. 새나 짐승은 손이 없으므로, 반드시 부리나 주둥이로 숙여서 땅에 닿게하여 먹을 것을 구한다. 때문에 학의 다리가 높고 보니 목이 길지 않을 수 없는데, 그래도 혹 땅에 닿지 않을까 염려하여 또 그 부리를 길게 만든 것이다. 진실로 닭의 다리를 학처럼 만들었더라면 반드시 뜰 가운데서 굶어 죽었을 것이다.”
然而說者曰: “角者不與之齒.” 有若爲造物缺然者, 此妄也. 敢問: “齒與之者誰也?” 人將曰: “天與之.” 復問曰: “天之所以與齒者, 將以何爲?” 人將曰: “天使之齧物也.” 復問曰: “使之齧物, 何也?” 人將曰: “此夫理也. 禽獸之無手也, 必令嘴喙, 俛而至地以求食也. 故鶴脛旣高, 則不得不脛長, 然猶慮其或不至地, 則又長其嘴矣. 苟令鷄脚效鶴, 則餓死庭間. 

나는 크게 웃으며 말하리라.
“그대가 말하는 이치란 것은 소나 말, 닭이나 개에게나 해당할 뿐이다. 하늘이 이빨을 준 것이 반드시 고개를 숙여 물건을 씹게 하려는 것이라고 치자. 이제 대저 코끼리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어금니를 심어 주어 장차 땅으로 숙이려고 하면 어금니가 먼저 걸리게 되니, 이른바 물건을 씹는 것이 절로 방해되지 않겠는가?”
어떤 이는 말하리라. 
“코에 힘입음이 있을 따름이다.”
나는 말한다. 
“그 어금니를 길게 해 놓고 코에 힘입느니, 차라리 어금니를 뽑아 버리고서 코를 짧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제서야 말하던 자는 처음의 주장을 능히 굳게 지키지 못하고 배운 바를 조금 굽히게 되리라. 
余大笑曰: “子之所言理者, 乃牛馬鷄犬耳. 天與之齒者, 必令俛而齧物也. 今夫象也, 樹無用之牙, 將欲俛地, 牙已先距, 所謂齧物者, 不其自妨乎?” 或曰: “賴有鼻耳.” 余曰: “與其牙長而賴鼻, 無寧去牙而短鼻?” 於是乎, 說者不能堅守初說, 稍屈所學. 

이것은 마음으로 헤아림이 미치는 바가 오직 소나 말, 닭이나 개에만 있지, 용이나 봉황, 거북이나 기린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쳐서 이를 죽이고 마니 그 코는 천하에 무적이다. 그러나 쥐를 만나면 코를 둘 곳이 없어 하늘을 우러르며 서있는다. 그렇다고 해서 장차 쥐가 범보다 무섭다고 말한다면 앞서 말한 바의 이치는 아닐 것이다.
是情量所及, 惟在乎馬牛鷄犬, 而不及於龍鳳龜麟也. 象遇虎, 則鼻擊而斃之, 其鼻也, 天下無敵也. 遇鼠, 則置鼻無地, 仰天而立. 將謂鼠嚴於虎, 則非向所謂理也. 

대저 코끼리는 직접 눈으로 보는데도 그 이치를 알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데, 또 하물며 천하 사물은 코끼리보다 만배나 됨에랴! 그런 까닭에 성인께서 《주역》을 지으실 적에 ‘상象’을 취하여 이를 드러내었던 것은 만물의 변화를 다하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夫象猶目見, 而其理之不可知者如此, 則又況天下之物, 萬倍於象者乎? 故聖人作易, 取象而著之者, 所以窮萬物之變也歟.


몇 해전 일이다. 강의 시간에 연암의 글을 강독하고서 평설을 써오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다. 한 학생이 과제 끝에 쓴 “장미는 예로부터 그 이름으로 존재해 왔으나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한 이름뿐”이라는 구절이 내 시선을 끌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인용한 대목이었다. 에코의 이 책에는 연암의 코끼리 이야기와 아주 비슷한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듣거라, 아드소. 수수께끼 풀이는, 만물의 근본되는 제 1원인으로부터 추론해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특수한 자료를 꾸역꾸역 모아 들이고 여기에서 일반 법칙을 도출하면 저절로 풀리는 것도 아니다.......뿔이 있는 짐승의 예를 들어 보자. 왜 짐승에게 뿔이 있겠느냐? 뿔이 있는 짐승에게는 윗니가 없다. 아직 모르고 있었다면 유념해 두어라. 그런데 윗니도 없고 뿔도 없는 짐승도 있으니 낙타가 바로 이런 짐승이다. 윗니가 없는 짐승에게는 위가 네 개라는 것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너는, 이빨이 없어서 제대로 씹을 수 없으니까 이런 짐승에게는 위가 네 개나 있어서 소화를 도모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너도 상상할 수 있고 추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뿔은 어떨까? 너도, 짐승의 머리에 뿔이 자라는 이유를 상상할 수 있을 게다. 머리에 골질조직骨質組織을 솟아나게 함으로써, 부족한 이빨의 수를 보충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설명이 못된다. 낙타에게는 윗니가 없다. 윗니가 없으면 위가 네 개 있고, 뿔이 있어야 마땅한데, 위가 네 개인 것은 분명하지만 뿔은 없다. 따라서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야 한다. 방어 수단이 없는 짐승의 머리에만, 몸 속의 골질이 뿔로 자라난다. 그러나 낙타의 가죽은 몹시 두껍다. 따라서 낙타에게는 뿔이라고 하는 방어 수단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면 여기에는 어떤 원칙이 있을 수 있다고 해야겠느냐......자연 현상에서 하나의 법칙을 이끌어 내자면 우선 설명되지 않는 형상에 주의하면서,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갖가지 일반적인 법칙을 서로 연계시켜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뜻밖의 결과들이 특수한 상황에서 서로 관련되는 데서, 혹은 여러 법칙을 두루 싸잡는 하나의 실마리가 잡혀 나온다. 이 실마리를, 유사한 경우에 두루 적용시켜 보거나, 다음 발전 단계를 미루어 헤아려 보면, 마침내 자기 직관이 옳은 지 그른 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이윤기 옮김, 1992, 열린책들) 하권 483쪽)

연암이 우리에게 던지는 첫 번째 화두는 코끼리이다. 흥미롭게도 에코는 낙타라는 기호를 가지고 연암과 비슷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코끼리나 낙타라는 기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소나 말, 개나 돼지에만 익숙해진 눈에 코끼리나 낙타는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의미들로 가득차 있다. 위 에코의 인용은 혼란스런 기호들 속에서 ‘하나의 법칙’에 접근해 가는 인식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앞선 연암의 문답과는 주객의 자리가 바뀌어 있다. 앞서 연암의 글에서 ‘하늘의 이치’를 들먹이며 예외적 존재를 인정치 않으려다 연암에게 공박당하는 ‘설자說者’의 태도는 윌리엄 수도사에게서 보다 세련된 논리를 갖추고서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나는 여기서 동서양 사고의 한 차이를 읽는다. 
이제 연암의 글을 따라가며 읽어 보기로 한다. 소나 말, 닭이나 개만 보며 평생을 살아온 시골 사람이 코끼리를 난생 처음 보았다면 그 느낌은 어떠했을까? 사진으로도 보지 못했고, 그림으로도 보지 못하다가 어느날 문득 만리 타국의 동물원 우리 속을 어슬렁거리며 왔다갔다 하는 코끼리의 모습과 처음 마주 했을 때, 그 느낌은 어떠했을까? 연암은 그 느낌을 괴상하고 진기하고 거대하고 한마디로 어마어마한 그 무엇이라고 했다. 그저 걸어가는데도 마치 비바람이 지나가는 듯 하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엉뚱하게도 젊은 시절 금강산을 유람하러 갔다가 동해에서 일출을 맞이하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일출 직전 먼 바다 위로 둥굴둥글 집채 인양 수도 없이 서있던, 물고기인지 짐승인지도 분간이 안되던 신기루. 연암은 바로 열 걸음 앞에서 육중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코끼리가 마치 일출과 함께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던 헛깨비는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더라고 했다. 코끼리를 처음 상면한 충격은 이렇게 해서 일단 진정의 국면으로 들어선다. 
그 다음 단락은 코끼리의 외모에 대한 묘사이다. 코끼리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독자를 위해 누구나 알고 있는 사물에 견주어 코끼리의 각 부분을 친절하게 그려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관심은 쓸데 없이 긴 어금니, 자벌레 같고 굼벵이 같고 누에의 꽁무니 같고 족집게 같은 코로만 집중되어 있다. 
코로 물건을 집으니 그것이 주둥이인가 싶어 코는 어디 있는가고 묻는 이도 있다. 아예 그 긴 코를 다리 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덩치는 집채 만한게 눈은 쥐눈처럼 조그맣다. 그럴 리가. 워낙에 덩치가 크고 코와 어금니가 희한하다 보니, 그 위에 붙은 눈이 그만 작게 보인 것일 뿐이다. 
그 살살 웃는듯한 작은 눈에서 어진 성품을 읽어내던 연암은 대뜸 사나운 범 두 마리를 일격에 쓰러뜨리는 코끼리의 완력으로 화제를 돌린다. 사나워 길들이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의 난폭한 범이 코끼리가 휘두른 코 한방에 즉사해 버렸다고 하니, 다시금 독자들은 코끼리의 어마어마한 크기와 긴 코의 위력을 상상으로 그려볼밖에 도리가 없다. 더욱이 애초에 죽일려던 것도 아니고 냄새가 싫어 그저 허공에 대고 휘두른다는 것이 빗맞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천하의 그 많은 사물들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늘이 만들었는가? 연암은 사뭇 그럴 리가 없다는 투다. 천하 만물을 만들었다는 하늘도 이름이 여러 가지다. 생긴 모양을 본떠서는 ‘천天’이라 하고, 하늘은 굳건하기에 성정으로 말할 때는 ‘건乾’이라 한다. 하늘의 주재자는 누구인가? 그를 일러 사람들은 ‘제帝’라고 한다. 그 오묘한 섭리와 작용을 이를제면 ‘신神’으로 일컫는다. 한 가지 하늘을 두고도 이같이 많은 이름으로 부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조물주가 이기理氣로 결합하고 형상을 품부稟賦하였다 하여, 마치 하늘이 교묘한 공장工匠이 되어 일일이 망치질하고 끌질 하고 도끼질하고 자귀질하여 온갖 만물을 직접 만들기라도 한 듯이 여긴다. 
그러나 그런가? 《주역》에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이 만든 것은 ‘초매草昧’ 즉 혼돈일 뿐이라고. 정작 하늘이 만들었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아직 갈려지지 않은 천지미판天地未判의 상태, 보다 생생하게 말하면 새벽이 오기 직전 아무 것도 구별할 수 없는 태초의 적막한 어둠 뿐이라고 《주역》은 적고 있다. 그렇다면 하늘이 만들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가? 돼지인가? 아니면 코끼리인가? 하늘이 만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하늘은 멧돌이 통밀을 갈아 때로 가늘게, 이따금 굵게, 곱고도 거칠게 땅으로 흩뿌려 놓듯, 그 날리는 가루 이상으로 헤아릴 길 없는 사물들을 이 세상 위로 제각금 흩어 놓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온갖 사물들 속에서 저 푸른 하늘을 주재하는 존재가 섭리하는 모종의 이치를 찾아내고자 한다. 거기서 그들이 찾아내는 진리란 대체로, ‘뿔이 있는 짐승은 윗니가 없다’거나, ‘날개가 있는 것은 다리가 두 개 뿐이다’와 같은 것들이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거나,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늘이지 마라’는 식이다. 그들은 또 닭의 다리가 학의 다리처럼 길지 않은데서 조물주의 오묘한 섭리를 발견하곤 쉽게 감동해 마지 않는다. 
그런데 코끼리는 이러한 일반적 규칙 어느 것으로 보더라도 맞지가 않으니 어찌할까? 코끼리의 어금니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코끼리는 왜 코가 저다지도 긴가? 어금니가 길기 때문에 걸리지 말라고 코가 긴 것일까? 그렇다면 차라리 어금니를 없애고 코를 짧게 해주는 것이 코끼리를 위하는 길이 아닐까? 조물주는 왜 코끼리에게 저런 장난을 쳤을까? 거기에 무슨 이유라도 있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내 눈으로 보아 아는 세계의 하찮은 지식을 가지고 세상의 온갖 진리를 꿰뚫으려 하는 노력은 코끼리 앞에 서면 무력해지고 만다. 코끼리만 예외로 해 놓고 그냥 넘어 갔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고민스럽다. 그 사나운 범 두 마리를 일격에 쓰러뜨린 코끼리의 그 코도 조막만한 새앙쥐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코끼리의 코 속으로 쥐가 들어가면 코끼리는 그만 미쳐 날뛰다 죽는다. 자! 사나운 범은 코끼리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그 용맹한 코끼리는 범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새앙쥐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그렇다면 새앙쥐는 범보다 위대한가? 이것을 수긍할 수 없다면, 대저 저 하늘의 일정한 섭리란 것은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
하늘의 섭리는 없다. 고정불변의 이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물은 제각금 살아 숨쉰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있다. 내가 알지 못한다 해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지 말아라. 지금 내 눈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저 코끼리야 말로 그 살아 있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천지만물의 주재자라고 믿는 하늘을 두고도 우리는 필요에 따라 천天·건乾·제帝·신神 등의 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가? 
같은 하늘이로되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지듯, 한 가지 사물 안에도 온갖 이치가 깃들어 있다. 나는 코끼리를 통해 세계와 만난다. 《주역》의 괘卦는 각각의 ‘상象’으로 형상화 된다. 그런데 그 괘상의 결합은 미묘하고도 복잡하여 일괄하여 말하기 어려운 무수한 ‘변상變象’들을 만들어 낸다. 이미지를 나타내는 ‘상象’이란 글자가 코끼리 상象자이기도 한 것은 무슨 심오한 관련이 있는가? 그것은 성인의 뜻이라 가늠할 수가 없다. 
연암은 예외를 인정치 않으려는 태도를 수긍하려 들지 않는다. 사실 ‘하늘의 이치’란 것도 ‘하나의 법칙’이란 것도 인간이 지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사물들은 살아 있다. 그것은 하나의 법칙으로 가둘 수가 없다. 하늘의 이름이 부르는 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지듯이, 사물의 질서는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하나의 기호는 하나의 진실만을 담고 있지 않다. 나는 그 기호를 통해 세상과 만난다. 기호와 기호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는 없다. 기호는 살아 있다. 코끼리는 살아 있다.
나는 이글을 쓰는 내내 연암의 〈상기〉를 에코가 읽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언제나 세상은 실체는 간데 없고 기호만이 괴력을 발휘해 왔다. 기호가 말씀이 되고 권력이 되어 살아 숨쉬는 사물의 생취生趣를 억압해 왔다. 기호와 세계 사이의 불균형과 간극은 영원히 메워질 수 없는 것인가? 
살펴본 대로 연암의 〈상기象記〉는 획일화된 가치 척도로 세계를 규정코자 하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거부의 뜻을 담아내고 있다. 우연히 열하 행궁에서 만난 코끼리를 앞에 두고, 인간의 사변적 지식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만고불변의 진리란 것이 어째서 이토록 허망한가를 그는 생각하고 있다. 
물상의 세계는 햇볕에 비친 까마귀의 날갯빛과도 같아 잡아 가두려고 하면 금세 달아나버린다. 이미지는 살아 있다. 내 손끝이나 눈길이 닿을 때마다 그것들은 경련한다. 살아있는 이미지들 속에서만이 삶의 정신은 빛을 발한다. 화석화된 이미지는 더 이상 이미지일 수가 없다. 이것이 코끼리를 앞에 세워 놓고 연암이 21세기의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다. 


1. 
이미지, 즉 상(象)은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없다. 고인들이 본 적이 없던 코끼리를 보았을 때, 그 사람들이 알고 있던 사실들로 이리저리 꿰맞추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보다, 어떻게든 저것을 익숙하고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편해지고자 하는 꼼수다. 

살아숨쉬는 코끼리를 담을 수 있는 말 따위는 세상에 존재한 적도 없으며, 앞으로 존재할 일도 없다. 
"대저 멧돌의 공능은 도는데 있을 뿐이니, 애초부터 어찌 일찍이 곱고 거친 것에 뜻이 있었겠는가?"

연암의 일갈은 어리석은 마음이 멈춘 곳에서 왔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Posted by 청공(靑空)
동양철학2014. 6. 9. 01:13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공자께서 이르시길,

아는 이는 좋아하는 이만 못하고 좋아하는 이는 즐기는 이만 못하다.


독일의 저명한 두뇌학자 Gerald Hüther에 따르면 뇌는 근육이 아니라서 훈련을 많이 한다고 더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좋고 재미가 있어야 뇌세포를 연결하는 신경망이 생성되어서 능력이 쌓이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논어의 맨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앎(배움)과 좋아함(기쁨), 그리고 즐거움이 논어의 심장인 것이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공자께서 이르시길,

배우고 이를 수시로 익힘은 기쁜 일이지 아니한가?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모른다하여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한가?


위 구절을 도올의 해석을 통해 이해한다면..

진실된 기쁨을 얻고자 한다면

떄에 맞는 새로운 것을 배워, 이를 끊임없이 정진하며 실천하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나눔으로 큰 즐거움을 얻으며,

누가 뭐라해도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이야말로

군자... 즉, 중용(中庸)의 삶을 사는 이인 것이다.


여기서 중용이란 흔들림이 없이 일관되며, 

지극히 높은 도(道)라고 공자는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능히 얻지 못하나

배우고 실천하고 뜻을 나누며 스스로 비추는 길을 걷는다면, 

그 삶이 멀리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Posted by 청공(靑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