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2015. 6. 17. 23:10

출처: 정민교수님의 '옛사람 내면풍경' (http://jungmin.hanyang.ac.kr/)


눈뜬 장님
一夜九渡河記와 幻戱記後識



강물은 두 산 사이에서 나와 바위에 부딪치며 사납게 흘러간다.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결, 구슬피 원망하는듯한 여울은 내달리고 부딪치고 뒤엎어지며 울부짖고 으르렁대고 소리지르니, 언제나 만리장성마저 꺾어 무너뜨릴 기세가 있다. 만대의 전차와 만 마리의 기병, 만대의 대포와 만개의 북으로도 그 무너질 듯 압도하는 소리를 비유하기엔 충분치 않다. 모래 위에는 큰 바위가 우뚝하니 저만치 떨어져 서 있고, 강가 제방엔 버드나무가 어두컴컴 흐릿하여 마치도 물 밑에 있던 물 귀신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와 사람을 놀래킬 것만 같고, 양옆에서는 교룡과 이무기가 확 붙들어 나꿔채려는 듯 하다. 어떤 이는 이곳이 옛 싸움터인지라 황하가 이렇듯이 운다고 말하기도 하나,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강물 소리는 어떻게 듣는가에 달려있을 뿐이다. 
河出兩山間, 觸石鬪狼, 其驚濤駭浪憤瀾怒波哀湍怨瀨, 犇衝卷倒, 嘶哮號喊, 常有摧破長城之勢. 戰車萬乘, 戰騎萬隊, 戰砲萬架, 戰鼓萬坐, 未足諭其崩塌潰壓之聲. 沙上巨石屹然離立, 河堤柳樹, 窅冥鴻濛, 如水祗河神爭出驕人, 而左右蛟螭試其挐攫也. 或曰此古戰場故河鳴然也, 此非爲其然也. 河聲在聽之如何爾. 

내 집은 산 속에 있는데, 문 앞에는 큰 시내가 있다. 매년 여름에 소낙비가 한 차례 지나가면 시내물이 사납게 불어 항상 수레와 말이 내달리고 대포와 북소리가 들려와 마침내 귀가 멍멍할 지경이 되었다.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 비슷한 것에 견주어 이를 듣곤 하였다. 깊은 소나무에서 나는 퉁소소리는 맑은 마음으로 들은 것이요,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소리는 성난 마음으로 들은 것이다. 개구리 떼가 앞다투어 우는 소리는 교만한 마음으로 들은 것이고, 일만 개의 축筑이 차례로 울리는 소리는 분노하는 마음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천둥이 날리우고 번개가 내리치는 소리는 놀란 마음으로 들은 까닭이요, 찻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는 운치있는 마음으로 들은 때문이다. 거문고의 높은 음과 낮은 음이 어우러지는 소리는 슬픈 마음으로 들은 것이요, 문풍지가 바람에 우는 소리는 의심하는 마음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듣는 소리가 모두 다 바름을 얻지 못한 것은 단지 마음 속에 생각하는 바를 펼쳐놓고서 귀가 소리를 만들기 때문일 뿐이다. 
余家山中, 門前有大溪, 每夏月急雨一過, 溪水暴漲, 常聞車騎砲鼓之聲, 遂爲耳崇焉. 余嘗閉戶而臥, 比類而聽之. 深松發籟此聽雅也, 裂山崩崖此聽奮也, 群蛙爭吹此聽驕也, 萬筑迭響此聽怒也, 飛霆急雷此聽驚也, 茶沸文武此聽趣也, 琴諧宮羽此聽哀也, 紙牕風鳴此聽疑也. 皆聽不得其正, 特胸中所意設而耳爲之聲焉爾. 

이제 나는 한밤 중에 한 줄기 황하를 아홉번 건넜다. 황하는 장성 밖에서 나와 장성을 뚫고서 유하와 조하, 황화와 진천 등 여러 물줄기를 한데 모아, 밀운성 아래를 지나면서는 백하가 된다. 나는 어제 배를 타고서 백하를 건넜는데, 이곳의 하류이다. 내가 아직 요동 땅에 들어서지 않았을 때 바야흐로 한 여름 불볕 속에 길을 가다가 갑자기 큰 강물이 앞에 나오는데, 붉은 파도가 산처럼 일어서며 그 끝간데가 보이지 않았다. 이는 대개 천리밖에 폭우가 내린 때문이었다. 
今吾夜中一河九渡. 河出塞外, 穿長城, 會楡河潮河黃花鎭川諸水, 經密雲城下爲白河. 余昨舟渡白河, 乃此下流. 余未入遼時, 方盛夏行烈陽中, 而忽有大河當前, 赤濤山立, 不見涯涘, 蓋千里外暴雨也. 

물을 건널 때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길래, 혼자 생각에 사람들이 고개를 우러러 하늘에 묵묵히 기도를 드리는가 싶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물을 건너는 사람이 물이 세차게 거슬러 올라가며 소용돌이 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제 몸조차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하고, 눈은 강물을 따라 내려가는 것만 같아 문득 어찔해지며 빙글 돌아 물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니, 그 머리를 우러름은 하늘에 기도하자는 것이 아니라 물을 피하여 보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다. 또한 어느 겨를에 경각에 달린 목숨을 묵묵히 빌 것이랴. 
渡水之際, 人皆仰首視天, 余意諸人者, 仰首黙禱于天. 久乃知渡水者, 視水洄駛洶蕩, 身若逆溯, 目若沿流, 輒致眩轉墮溺. 其仰首者非禱天也, 乃避水不見爾. 亦奚暇黙祈其須臾之命也哉. 

그 위태로움이 이와 같은데도 강물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모두들 요동 평야는 평평하고 광활하기 때문에 물줄기가 성내 울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황하를 모르고서 하는 소리다. 요하遼河가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밤중에 건너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낮에는 능히 물을 볼 수 있는 까닭에 눈이 온통 위험한데로만 쏠려서 바야흐로 부들부들 떨려 도리어 그 눈이 있음을 근심해야 할 판인데 어찌 물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이제 내가 한밤중에 강물을 건너매, 눈에 위태로움이 보이지 않자 위태로움이 온통 듣는데로만 쏠려서 귀가 바야흐로 덜덜 떨려 그 걱정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其危如此而不聞河聲. 皆曰遼野平廣故水不怒鳴, 此非知河也. 遼河未嘗不鳴, 特未夜渡爾. 晝能視水故, 目專於危, 方惴揣焉, 反憂其有目, 得安有所聽乎? 今吾夜中渡河, 目不視危, 則危專於聽. 而耳方惴揣焉, 不勝其憂. 

내가 이제야 도를 알았다. 마음이 텅비어 고요한 사람은 귀와 눈이 탈이 되지 않고, 눈과 귀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더더욱 병통이 되는 것임을. 이제 내 마부가 말에게 발이 밟혀 뒷 수레에 실리고 보니, 마침내 고삐를 놓고 강물 위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올려 발을 모두니, 한 번 떨어지면 그대로 강물이었다. 강물로 땅을 삼고 강물로 옷을 삼고 강물로 몸을 삼고 강물로 성정을 삼아 마음에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고나자 내 귀 속에 마침내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번을 건넜으되 아무 걱정 없는 것이, 마치 앉은 자리 위에서 앉고 눕고 기거하는 것만 같았다. 
吾乃今知夫道矣. 冥心者, 耳目不爲之累, 信耳目者, 視聽彌審而彌爲之病焉. 今吾控夫足爲馬所踐則, 載之後車, 遂縱鞚浮河, 攣膝聚足於鞍上, 一墜則河也. 以河爲地, 以河爲衣, 以河爲身, 以河爲性情, 於是心判一墮, 吾耳中遂無河聲. 凡九渡無虞, 如坐臥起居於几席之上. 

예전 우임금이 황하를 건너는데 황룡이 배를 등져 지극히 위태로왔다. 그러나 살고 죽는 판가름이 먼저 마음에 분명하고 보니 용이고 도마뱀이고 그 앞에서 크고 작은 것을 헤아릴 것이 없었다. 소리와 빛깔은 바깥 사물인데 바깥 사물이 항상 눈과 귀에 탈이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보고 듣는 바름을 잃게 만듦이 이와 같다. 그러니 하물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그 험하고 위태로움이 황하보다 심하여 보고 듣는 것이 문득 병통이 됨에 있어서이겠는가? 내 장차 내 산 중에 돌아가 다시 앞 시내의 물 소리를 듣고 이를 징험하여, 장차 몸 놀림에 교묘하여 스스로 총명하다고 믿는 자를 경계하리라. 
昔禹渡河, 黃龍負舟, 至危也. 然而死生之辨, 先明於心, 則龍與蝘蜓不足大小於前也. 聲與色外物也, 外物常爲累於耳目, 令人失其視聽之正, 如此. 而況人生涉世, 其險且危, 有甚於河, 而視與聽, 輒爲之病乎! 吾且歸吾之山中, 復聽前溪而驗之. 且以警巧於濟身, 而自信其聰明者. 

〈일야구도하기〉는 《열하일기》 〈산장잡기〉 가운데 실려있다. 북경에 도착한 사신 일행에게 황제는 만리장성 밖 열하의 피서산장으로 날짜를 정해 대어 오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큰 비에 물이 불어난 황하를 밤낮 없이 빠른 길을 찾아 재촉하다 보니, 그야말로 하루밤에 이리저리 강물을 아홉번씩이나 건너는 모험을 감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글은 그러니까 그때의 소감을 적은 글이다. 
놀란 듯 성난 듯 원망하는 듯 파도와 물결은 온통 내달리고 부딪치면서 거침없이 쏟아져 내린다. 우뚝 선 만리장성조차도 그 도도한 기세엔 맥없이 무너지고 말 지경이다. 만대의 전차와 만 마리의 기병, 만대의 대포와 만개의 북이 일시에 내달리고 일시에 포성을 내지르고 둥둥 울린다 해도 이 소리보다는 못할 것이다. 그 뿐인가? 강 가 모래 위에는 큰 바위가 저만치 떨어져 시커멓게 우뚝 서 있고, 강가 버드나무는 어두운 그늘을 만들어, 강물 속 물귀신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배 위에 탄 사람을 놀래킬 것만 같다. 뱃전을 할금대는 미친 물결은 마치 교룡과 이무기가 사람을 나꿔채 가려고 이따금씩 손톱을 곧추세워 할켜대는 것만 같다. 황하는 왜 이렇게 우는가? 옛 싸움터인지라 이곳에서 죽은 원혼들이 워낙에 많아 그렇게 우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소리는 어떻게 듣느냐에 달린 것일 뿐이다. 처음 느닷없이 황하의 미친 물결과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을 묘사하고 나서, 아직 그 광경에 눈이 팔려 있는 사이 어느새 연암은 본론으로 들어선다. ‘소리는 듣기 여하에 달려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두 번째 단락에서는 다시 부러 딴전을 부리며 글의 호흡을 고른다. 황해도 골짜기의 연암협에 있는 내 집 앞에도 큰 시내가 하나 있다. 여름철 소낙비가 한 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사납게 불어 수레소리 말소리, 대포소리 북소리가 뒤섞인 듯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문을 닫고 가만히 그 소리를 들어보면, 소리는 그때마다 다른 모양새로 내게 들려오는 것이다. 어떤 때는 강물 소리가 소나무 가지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가는 송뢰성松籟聲으로 들릴 때가 있다. 그것은 그 때 내 마음이 그렇듯이 맑았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답답하고 성난 일이 있을 때 그 소리는 문득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소리로 들렸다. 어떤 때는 한밤중에 개구리떼가 와글대듯 들리기도 했는데, 내 마음에 교만한 기운이 있어서 그랬던 것도 같다. 때로 물소리가 마치 일만개의 타악기가 동시에 둥둥 울리듯 들릴 때도 있었다. 그 때 나는 마음 속에 터질듯한 분노를 지니고 있었다. 
소낙비에 불어난 강물 소리는 사실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 문닫고 들어앉은 내게는 그 소리가 그때마다 다르게 들린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소리는 귀로 들은 소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은 소리일 뿐이다. 내 눈으로 직접 강물을 바라보지 않고, 단지 귀로만 들으니 마음이란 놈이 튀어나와 자꾸만 제 가늠으로 헛생각을 지어내어 허상을 꾸며내는 것이다. ‘소리는 귀로 듣지 않는다. 마음으로 듣는다.’ 같은 소리도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들린다. 그럴진대 마음의 소리는 허상일 뿐인가? 
소리는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듣는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다시 논의는 황하로 돌아온다. 이제 나는 한밤 중에 황하를 아홉번이나 건넜다. 장성 밖에서 기세 좋게 장성을 꿰뚫고 나온 강물은 그밖에 여러 물줄기를 한데 모아 밀운성 아래에 이르러 장대한 백하를 이룬다. 그런데 이 강물은 그 규모란 것이 만만치 않아서, 대낮 땡볕 속에 길을 가다가 강물과 만났는데도, 붉은 파도가 산처럼 우뚝 높이 서 있는 것이다. 비도 오지 않는 이 땡볕 속에 웬 물결이냐고 의아해 하노라면, 문득 천리 밖에서 폭우가 내린 탓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천리 밖 폭우가 천리 아래에서 미친 물결을 일으키는 곳이 이곳 황하다. 그 규모는 내 시골집 앞을 흐르던 도랑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도랑물이 불어난 소리를 듣고도 내 마음은 이미 온갖 생각을 자아냈는데, 이제 이 엄청난 황하를 앞에 두고서 나는 또 무슨 생각을 일으킬 것인가?
강물을 건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아래를 보려들지 않는다. 하늘을 향해 목숨을 기도하는가 싶지만, 그 거세찬 소용돌이를 보노라면 머리가 온통 빙글빙글 돌고, 그 위에 눈길을 던지면 제 몸마저 그 물살을 따라 떠내려 갈것만 같아서 순간에 어찔해지며 강물 위로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일제히 고개를 쳐드는 것은 기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물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보면 안된다. 보면 탈이 난다. 눈에 현혹되지 말아라. 보이는 것이 실상은 아니다. 앞서는 소리는 마음으로 듣는다고 해 놓고, 여기서는 다시 눈 때문에 마음이 허상을 지어냄을 말하였다. 그렇다면 눈과 귀가 먼저인가? 아니면 마음이 먼저인가? 연암협에서는 마음이 귀로 들려오는 소리를 바꾸어 버렸고, 황하에서는 눈으로 보는 것이 내 마음을 뒤흔들어 버렸다. 여기에도 선후가 있는가?
이상한 것은 이런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미친 물결에 이 몸이 금세 떠내려 갈 것만 같이 빙글빙글 도는데도 정작 강물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결코 요동 평야가 평평하고 드넓어 그런 것이 아니다. 황하의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그 거센 물결에 눈이 온통 팔려서 미처 그 물결이 일으키는 굉음이 귀에 들어올 겨를이 없는 것일 뿐이다. 밤중에 건너면 상황은 완전히 반대로 된다. 낮에 보이던 그 물결의 어지러움은 없고, 한밤 중의 황하는 다만 소리로 건너는 사람의 넋을 다 앗아간다. 우르르르 하고 물결이 밀려들면 금세라도 내가 거기에 한데 휩쓸려 떠내려갈 것만 같고, 저리로 밀려가면 휴우 살았구나 싶다. 도대체 물살이 얼마나 큰지,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 조차 가늠할 수 없기에 두려움은 공포로 변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낮에는 눈에 보이는 격랑 때문에 소리가 들리지 않더니, 밤에는 정작 그 물결은 보이지 않는데 소리가 온갖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이다. 강물에는 귀로 들리는 소리가 있고, 눈으로 보는 물살이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내가 놓인 상황에 따라 들리기도 하고 들리지 않기도 한다.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한다. 내 눈는 그대로인데 왜 보이고 보이지 않는가? 내 귀는 변함없건만 어째서 들리고 들리지 않는가? 그럴진대 나는 내 눈과 귀를 믿어야 옳을까? 아니면 내 마음을 믿어야 옳을까? 
아! 그랬었구나. 꼭같은 강물 소리도 내 마음의 빛깔에 따라 영 딴판의 소리로 들리는 것이로구나. 본시 내 눈과 내 귀란 것은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로구나. 내 마음이란 것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로구나. 그러면서 연암은 ‘명심자冥心者’와 ‘신이목자信耳目者’를 구분한다. ‘명심冥心’이란 속념을 끊어 마음을 고요하게 지니는 것이니, 당나라 수아修雅의 〈문송법화경가聞誦法華經歌〉에 “눈 감고 마음 비워 자세히 들으라. 合目冥心子細聽”의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명심’과 한가지 뜻이다. 그러니 ‘명심자’는 속된 생각을 들이지 않고 이목에 현혹되지 않는 고요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이에 반해 ‘신이목자’는 제 눈으로 보고 제 귀로 들은 것만을 신뢰하고, 직접 보고 듣지 못한 것은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다가 결국 그 때문에 진실을 놓치고 마는 사람이다. 
마음이 고요한 사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탈이 되지 않는다. 눈과 귀만을 믿는 사람은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할수록 더 탈이 된다. 그래서 황하의 소용돌이치는 물결을 보다가 제 몸도 따라 빙글 돌아 물에 떨어지기 일쑤이고, 귀 멍멍한 소리에 기가 질려 어쩔 줄 모르게 된다. 발다친 마부 때문에 말고삐 잡아줄 말구종꾼도 없이 혼자 말안장 위에 발을 모우고 앉아 흔들흔들 황하를 건넜다. 자칫 기우뚱 하는 날엔 그대로 황하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마음을 고요히 비워 황하와 내가 하나가 되고 보니, 마침내 그 우레와 같이 쿵쾅대던 강물소리는 내 귀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하루밤에 아홉번을 건너는 속에서, 벌벌 떠는 사람들의 황황한 거동을 바라보며 나는 집안에 거처하듯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편안하게 강물을 건널 수 있었다. 소리를 귀로 들으려 하지 마라. 소리는 귀로 듣지 않는다. 텅 빈 마음으로 들어라. 귀로 듣는 소리는 마음에 공연한 작용을 일으켜 허상을 만들어낼 뿐이다. 마음을 비우면 내 안으로 강물 소리가 차올라서 내가 바로 강물이 된다. 
예전 우임금이 황하를 건널 때도 그랬다. 배가 황룡의 등위에 올라앉아 언제 어떻게 뒤집어질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우임금은 하늘의 뜻에 내맡겨 마음에 조금의 의심이 없었다. 그러자 황룡은 도마뱀이나 다를 바 없게 되었다.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 내 눈에 드는 빛깔은 모두 나와는 상관없는 바깥 사물일 뿐이다. 그런데 이 소리와 빛깔이 작용을 일으켜 내 눈과 귀에 탈이 생긴다. 그래서 마음이 덩달아 움직인다. 소리와 빛깔의 작용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려면 ‘명심’의 경계에 도달해야 하리라. 한 세상을 건너가는 일은 황하의 위험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럴진대 나는 내 눈과 귀를 경계해야 하리라. 내 마음을 우선 다스려야 하리라. 내 마음에서 눈과 귀가 일으키는 병통을 걷어내야 하리라. 이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나는 다시 돌아가 내 앞 시내의 물 소리를 다시 들어 보겠다. 내 마음에 따라 온갖 빛깔을 지어내던 그 물소리를 다시 들어 보겠다. 내 마음을 텅 비우면 그 소리조차 지워질 것인지를 시험해보겠다. 그리고 이 깨달음으로 제 눈과 귀의 총명을 믿고서 스스로 처세에 능란하다고 믿는, 마침내 그로 인해 제 발등을 찍고 마는 자들을 경계하겠다. 

내가 오늘 밤에 이 물을 건넘은 천하에 지극히 위태로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말을 믿고 말은 발굽을 믿고, 발굽은 땅을 믿어 말고삐를 잡지 않은 보람을 거둠이 이와 같도다. 수역首譯이 주주부周主簿에게 말한다. 
“옛날에 〈위어危語〉를 지은 자가 있어 말하기를, ‘장님이 눈먼 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연못가에 섰도다’라고 했더니, 참으로 우리들의 오늘밤 일입니다 그려.”
내가 말했다. 
“그것이 위태롭기는 해도 위태로움을 잘 안 것은 아니라고 보네.”
두 사람이 말한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장님을 보고 있는 자는 눈이 있는 사람인지라, 장님을 보고는 스스로 그 마음에 위태롭게 여기는 것이지, 정작 장님은 위태로운 줄을 알지 못하는 법이거든. 장님은 위태로운 것이 보이질 않는데, 무슨 위태로움이 있겠는가?”
서로 더불어 크게 웃었다. 따로 일야구도하기를 적은 것이 있다. 
余今夜渡此河, 天下之至危也. 然而, 我則信馬, 馬則信蹄, 蹄則信地, 而乃收不控之效如是哉! 首譯語周主簿曰: “古有爲危語者, 謂盲人騎瞎馬, 夜半臨深池, 眞吾輩今夜事也.” 余曰: “此危則危矣, 非工於知危也.” 二人曰: “何爲其然也?” 余曰: “視盲者有目者也. 視盲者而自危於其心, 非盲者知危也, 盲者不見所危, 何危之有?” 相與大笑. 別有一夜九渡河記. 

위 대목은 《열하일기》〈막북행정록〉 속에서 앞서 〈일야구도하기〉를 적을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장님이 눈먼 말을 타고서 한밤중에 깊은 연못가에 서있다. 위태로움의 지극함을 묘사한 말이다. 한밤중에 물결이 넘실대는 강물을 아홉번이나 건넌 일은 그 아슬아슬하기가 여기에 견줄만 하다. 생각할수록 진땀이 흐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암은 여전히 뚱딴지 같은 소리만 하고 있다. 이 사람. 내 보기에 장님은 위태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보네. 정작 본인은 하나도 위태롭지 않건만 공연히 곁에서 지켜 보는 이가 위태롭게 보는 것일 뿐일세. 왜 그런가? 그는 눈앞에 뵈는 것이 없으니, 지금 제가 위태로운 연못가를 지나는지, 지금이 한 밤중인지, 또 제가 탄 말이 눈이 멀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으니, 그는 말을 믿고 말은 또 제 발을 믿고, 발은 또 땅을 믿어 그저 평지를 걷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을터이니 위태롭기는 무엇이 위태롭단 말인가? 공연히 눈 가진 우리가 곁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것일 뿐이지. 안 그런가? 
보이지 않으면 위태로움도 없다. 들리지 않으면 두려움은 없다. 위태로움과 두려움은 보고 듣는데서 생겨난다. 앞 못보는 장님에게는 조금의 두려움도 위태로움도 없다. 그는 손에 땀을 쥐게하는 위태로움 앞에서도 태연히 평지를 걷듯 뚜벅뚜벅 걷는다. 가히 ‘명심冥心’의 경계에 들었다 할만하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눈과 귀란 것은 또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이냐? 눈앞의 온갖 것에 현혹되어 옴짝달싹도 못하느니, 차라리 장님이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다시 책문밖에 이르러 책문 안을 바라다 보니 일반 집들도 모두 다섯 들보가 높이 솟았고, 띠로 이엉을 이어 위를 덮었는데, 등마루는 우뚝하고 대문은 가지런하였다. 거리는 평평하고 곧아서 양쪽 가로 마치 먹줄을 친 듯 하였다. 담장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 타는 수레와 짐 싣는 수레가 길 가운데로 이리저리 오가고, 벌려 놓은 그릇들은 모두 그림을 그린 자기들이다. 이미 그 제도를 보고 나니 시골구석의 촌티라고는 아예 없었다. 예전에 내 친구 홍덕보가 일찍이 규모는 큰데도 심법心法은 세밀하다고 말하더니, 책문은 천하의 동쪽 끝 모퉁이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매, 앞길의 유람이 갑자기 생각이 탁 막히면서 곧장 이 길로 되돌아가고만 싶어, 나도 몰래 배가 부글거리고 등이 타는 듯 하였다. 
復至柵外, 望見柵內, 閭閻皆高起五樑, 苫艸覆盖, 而屋脊穹崇, 門戶整齊, 街術平直, 兩沿若引繩然. 墻垣皆甎築, 乘車及載車, 縱橫道中. 擺列器皿, 皆畵瓷. 已見其制度,絶無邨野氣. 往者洪友德保, 嘗言大規模細心法, 柵門天下之東盡頭, 而猶尙如此, 前道遊覽, 忽然意沮, 直欲自此徑還, 不覺腹背沸烘. 

내가 크게 반성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질투심인게로구나. 내가 평소 성품이 담박하여 남을 부러워 하고 시기 질투하는 것은 본시 마음에 없었다. 이제 한 번 다른 지경으로 건너와 본바가 만분의 일에 불과 한데도 다시금 쓸데없는 망상이 이와 같음은 어찌된 것인가? 이는 바로 본바가 작은 까닭일 뿐이다. 만약 여래의 밝은 눈을 가지고 시방세계를 두루 살펴본다면 평등치 않음이 없으리라. 온갖 일이 평등하고 보면 절로 질투하고 선망하는 마음이 없게 될 것이다.”
장복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만일 네가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어떻겠느냐?”
“중국은 오랑캐인걸입쇼. 쉰네는 원하지 않습니다요.”
조금 있으려니까 맹인 한 사람이 어깨에 비단 주머니를 걸치고 손으로는 월금月琴을 타면서 걸어간다. 내가 크게 깨달아 말하였다. 
“저것이 어찌 평등안平等眼이 아니겠는가?”
余猛省曰: “此妒心也. 余素性淡泊, 慕羨猜妒, 本絶于中. 今一涉他境, 所見不過萬分之一, 乃復浮妄若是, 何也? 此直所見者小故耳. 若以如來慧眼, 遍觀十方世界, 無非平等. 萬事平等, 自無妒羨.” 顧謂張福曰: “使汝往生中國, 何如?” 對曰: “中國胡也. 小人不願.” 俄有一盲人, 肩掛錦囊, 手彈月琴而行. 余大悟曰: “彼豈非平等眼耶!”

여기에도 장님 이야기가 나온다. 《열하일기》〈도강록〉 중의 한 부분이다. 예전에 중국에 오기전 나는 중국이 뙈놈의 나라, 오랑캐의 천지인줄로만 알았다.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북벌北伐, 즉 ‘무찌르자 오랑캐’의 구호가 의당 그래야만 하는 진리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국경을 건너 중국 땅에 들어서고 보니, 중국에서는 가장 귀퉁이 시골의 하나임에 분명할 이곳의 문물이 내 이목을 압도해 온다. 우뚝한 들보 위에 이엉을 얹은 집들과 가지런한 대문들, 벽돌로 쌓은 담, 사통팔달로 죽죽 뻗은 도로 위로 이리 저리 부산하게 움직이는 각종 수레들, 하다 못해 집에서 쓰는 허드렛 그릇도 모두 그림을 그려 넣은 도자기 들이다. 이것이 우리가 무찌르자고 노래하던 오랑캐의 시골 모습인가? 시골이 이럴진대 그 서울은 또 어떠할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그만 부끄럽고 풀이 팍 꺾여서 그길로 내쳐 돌아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마음을 고쳐 먹기로 한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지 못한데서 비롯된 질투심일 뿐이다. 내 본 바가 워낙에 작고 보니, 조금만 새로운 것을 보아도 눈과 귀가 현혹되어 중심을 잃고 마는 때문이다. 문제는 내 눈이다. 만일 편견 없는 석가여래의 눈으로 시방세계를 살펴 본다면 조선이나 중국이나 다를 바 없으리라. 평등의 눈으로 보면 부러워 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이 다 스러지리라. 나는 ‘명심’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석가여래의 눈으로 돌아고자 한다. 
그래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말구종꾼 장복이에게 묻는다. “얘! 너 중국에 태어나고 싶지 않니?” 느닷없는 질문에 녀석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대답한다. “에이! 싫어요. 나으리. 중국은 뙈놈의 나라가 아닙니까요. 전 오랑캐는 되기 싫은걸입쇼.” 녀석의 논리는 단순하다. 오랑캐인 청나라가 지배하는 중국은 중국이 아니다. 제 아무리 문화와 문물이 발달해도 그것은 무찔러야 할 오랑캐일 뿐이다. 그렇지만 조선은 요순공맹의 도를 지켜나가고 있기에 문화와 문물이 아무리 뒤쳐져도 오랑캐가 아니라 중화中華인 것이다. 말 그대로 ‘못 살아도 나는 좋아’다. 아! 이념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로구나. 중국 먼 변방의 문물이 이렇듯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발달한 것이건만, 말구종꾼의 의식 깊은 곳까지 이른바 춘추의리란 것이 뿌리 박혀 있어, 좋은 것도 좋은 것으로 보려 들지를 않는구나. 
그때 마침 장님 하나가 비단주머니를 어깨에 걸치고서 월금을 타며 길을 걸어간다. 아! 그의 눈이야 말로 평등하겠구나. 오랑캐도 없고 중화도 없고, 보는 것으로 인한 시기심과 질투심도, 부끄러움도 자괴감도 없겠구나. 그의 눈이 곧 석가여래의 눈이로구나. 연암의 글에는 소경이 등장하는 것이 아직도 한 편 더 있다. 

이날 홍려시소경 조광련이 의자를 나란히 하고서 요술을 구경하였다. 내가 조경에게 말하였다.
“눈이 능히 시비를 판단치 못하고 진위를 살피지 못할진대 비록 눈이 없다고 해도 괜찮으리이다. 그러나 항상 요술하는 자에게 속게 되는 것은 이 눈이 일찍이 망녕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분명하게 본다는 것이 도리어 빌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려.”
조경이 말했다. 
“비록 요술을 잘하는 이가 있다 해도 소경은 속이기가 어려울터이니, 눈이란 과연 항상된 것일까요?”
내가 말했다. 
“우리나라에 서화담 선생이란 이가 있었지요. 밖에 나갔다가 길에서 울고 있는 자를 만났더랍니다. ‘너는 왜 우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세 살에 눈이 멀어 지금에 사십년이올시다. 전일에 길을 갈 때는 발에다 보는 것을 부치고, 물건을 잡을 때는 손에다 보는 것을 부치고, 소리를 듣고서 누구인지를 분간할 때는 귀에다 보는 것을 부치고, 냄새를 맡고서 무슨 물건인가를 살필 때는 코에다 보는 것을 부치었습지요.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으되, 저에게는 손과 발과 코와 귀가 눈 아님이 없었습니다. 또한 어찌 다만 손과 발, 코와 귀 뿐이겠습니까? 날이 이르고 늦은 것은 낮에 피곤함을 가지고 보았고, 물건의 모습과 빛깔은 밤에 꿈으로 보았지요. 장애될 것이 없어 일찍이 의심스럽거나 어지럽지 않았습지요. 이제 길을 가는 도중에 두 눈이 갑자기 맑아지고 백태가 끼었던 눈이 저절로 열리고 보니, 천지는 드넓고 산천은 뒤섞이어 만물이 눈을 가리고 온갖 의심이 마음을 막아서 손과 발, 코와 귀가 뒤죽박죽이 되어 착각을 일으켜 온통 예전의 일상을 잃게 되었습니다. 아마득히 집을 잃어 스스로 돌아갈 길이 없는지라, 그래서 웁니다.’ 선생이 말하였다. ‘네가 네 지팡이에게 물어본다면 지팡이가 응당 절로 알리라.’ 말하기를, ‘제 눈이 이미 밝아졌으니 지팡이를 어디에다 쓴답니까?’ 선생이 말하였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바로 거기에 네 집이 있으리라.’ 이로 말미암아 논한다면 눈이 그 밝음을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려. 오늘 요술을 보니, 요술장이가 능히 속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구경하는 사람이 스스로 속은 것일 뿐입니다.”
是日鴻臚寺少卿趙光連, 聯倚觀幻. 余謂趙卿曰: “目不能辨是非察眞僞, 則雖謂之無目可也. 然常爲幻者所眩, 則是目未嘗非妄, 而視之明, 反爲之祟也.” 趙卿曰: “雖有善幻難眩瞽者, 目果常乎哉.” 余曰: “弊邦有徐花潭先生. 出遇泣于道者曰: ‘爾奚泣?’ 對曰: ‘我三歲而盲, 今四十年矣. 前日, 行則寄視於足, 執則寄視於手, 聽聲音而辨誰某, 則寄視於耳, 嗅臭香而察何物, 則寄視於鼻. 人有兩目, 而吾手足鼻耳無非目也. 亦奚特手足鼻耳? 日之早晏, 晝以倦視, 物之形色, 夜以夢視, 無所障碍, 未曾疑亂. 今行道中, 兩目忽淸, 瞖瞙自開, 天地廖廓, 山川紛鬱, 萬物礙目. 群疑塞胸, 手足鼻耳, 顚倒錯謬, 皆失故常, 渺然忘家, 無以自還, 是以泣爾.’ 先生曰: ‘爾問爾相, 相應自知.’ 曰: ‘我眼旣明, 用相何地.?’ 先生曰: ‘還閉爾眼, 立地汝家.’ 由是論之, 目之不可恃其明也如此. 今日觀幻, 非幻者能眩之, 實觀者自眩耳.” 

역시 《열하일기》 중 〈환희기후지〉이다. 열하에서 거리의 요술을 보고나서 그 소감을 적은 대목이다. 스무가지에 달하는 요술장이의 요술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나서 연암은 시비도 가리지 못하고 진위도 분간할 수 없는 눈이란 없는 거나 진배없다고 말한다. 요술을 구경하는 사람이 속지 않으려고 자세히 보면 볼수록 더 잘 속게 된다. 앞서 〈일야구도하기〉에서, 보는 것이 자세하면 할수록 더욱더 미혹되어 급기야 강물에 빠지고 마는 ‘신이목자信耳目者’를 떠올린다. 그렇지만 천하의 요술장이도 장님을 속일수는 없다. 이어 연암은 이미 예전 〈답창애〉에서도 써먹은바 있는 서화담 이야기를 들고 나온다. 다만 내용은 이 글이 더 자세하다. 
세 살에 눈이 멀어 사십년간 소경으로 살아온 사람이, 제 손과 발을 눈으로 여기고 제 코와 귀를 눈으로 알며 아무 불편함 모르고 살아오던 그가, 어느날 길을 가다가 갑자기 눈이 열렸다. 그러자 평온하던 세계는 일순간에 혼란에 빠지고 만다. 제 눈을 대신하던 손과 발, 코와 귀는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 되어 버리고, 아직 내것이 아닌 내 눈은 온통 내 마음에 의심만을 일으켜 이 골목이 저 골목 같고, 이 대문이 저 대문 같아 제 집조차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눈을 뜨는 순간 오히려 눈이 멀어, 자신의 정체성에 심각한 위협을 받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망연자실 어쩔 줄 모르고 길 가에 서서 울고 있다. 눈을 떴으되 그 눈이 아무 소용 없으니 말 그대로 ‘눈 뜬 장님’이다. 
사연을 들은 서화담의 처방은 뜻밖에 간단하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눈으로 보려들지 말아라. 항상성을 회복하는 길, 정체성을 되찾는 길은 네 눈에 있지 않다. 오히려 네 손과 발, 네 코와 귀를 믿어라. 네 눈에 현혹되지 말고 네 지팡이를 믿어라. 불편함이 없던 세계, 아무 걸림이 없던 세계로 돌아가라. 네 마음의 평형을 깨뜨리는 의심의 덩어리를 놓아 버려라. 
이 우화는 읽기에 따라 여러 맥락으로 읽힌다. 〈답창애〉에는 같은 우화를 소개하면서, 그 앞에 “본분으로 돌아가라 함이 어찌 문장만이리오. 일체의 온갖 일들이 다 그렇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말하자면 장님이 눈을 도로 감는 것을 본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풀이한 것이다. 좋은 문장을 쓰려면 눈을 감아라. 훌륭한 시를 쓰고 싶거든 눈을 감아라. 문장이나 시만이 아니다. 인간 세상 온갖 일이 다 그렇다. 이때 눈을 감는다는 것은 ‘명심’의 상태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현혹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본래 자리, 세계와 교통할 수 있는 촉수가 싱싱히 살아있던 그 지점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사십년간 장님으로 살아오던 그에게 개안은 과연 천지개벽과도 같은 놀라움이었겠지만, 그로 인해 자신을 잃고 만다면, 개안의 기쁨은 잠깐일뿐 그에게는 더큰 불행을 가져다 줄 따름이다. 
‘본분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단지 ‘네 주제, 네 분수를 알아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장님 주제에 만족하고 눈 뜰 생각 아예 말고 지팡이만 믿고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면 어떤 눈뜸도 기쁨이기는커녕 새로운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내가 소화할 수 없는 세계, 내 것이 아닌 바깥 세상만을 기웃거리다가는 오히려 나 자신을 잃게 될 뿐이다. 조나라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려다 오히려 제 본래의 걸음 마저 잃고 엉금엉금 기어 갔다는 저 연나라 소년의 ‘한단학보邯鄲學步’를 기억하는가? 서시의 찡그림을 흉내내다가 온 마을 사람으로 하여금 대문을 닫아걸게 만들었던 동시의 이야기가 생각나는가? 시류만을 좇아 이리저리 몰려 다니지 말아라. 남의 흉내나 내다가는 결국 제 목소리마저 잃고 만다. 돌아가야 할 제 집마저 찾지 못하게 된다. 길에서 울게 된다. 눈을 믿지 마라. 부릅뜨고 볼수록 더 현혹된다. 도로 눈을 감아라. 마음으로 보아라. 


1. 

황하를 건너면서 눈과 귀에 현혹이 되어버리면 위태로움에 처하게 된다. 
하물며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인생길은 얼마나 어려움이 많으랴.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이 글에서 연암은 명심자(冥心子)와 신이목자(信耳目子)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윽하고 고요한 마음을 가진 이와, 눈과 귀를 통해 경계에 끄달리는 마음을 가진 이의 차이점을 말하며...
본 것이 작음에 자기의 눈과 귀만 믿고,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는 이들을 얘기한다. 

장님 주제에 눈을 떠서 무엇하랴. 

Posted by 청공(靑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