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2017. 2. 5. 03:02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자왈 삼호 오도 일이관지)

공자께 말씀하셨다.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었느니라."


曾子曰 "唯." 
(증자왈유)

이에 증자가 "예"하고 답하였다. 


子出, 門人問曰 "何謂也?"
(자출문인문왈 하위야)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들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증자왈 부자지도 충서이이의)

증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道)는 충(忠)과 서(恕)일 뿐입니다."



세계는 무엇인가?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 무엇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위에 예시된 논어의 구절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있어서 이보다 간결하고 옳은 답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을 대하고, 어떠한 일을 함에 있어 
진실된 마음을 다하고(忠)
타인의 입장을 역지사지, 즉 타인의 입장을 헤아려 공감한다면(恕)
항상 자신이 임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성 혹은 이론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부단히 칼로 자르듯, 줄로 가는 듯, 정으로 쪼는 듯, 숫돌로 광을 내는 듯 다스림으로써
마치 맑은 호수와 거울처럼 고요히 할 때 저절로 몸짓 하나, 말 한마디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경지일 것이다. 

그 길에서는 자신의 마음에 삿됨(私)이 자리잡는 것을 항상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삿된 마음으로 인하여 진실된 마음에서 멀어지고..
결국 자기가 자신을 속이고, 자기가 자신을 망하는 길로 이끌게 되기 때문이다. 

삿된 마음은 수양이 깊어질수록 그 모습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자연스러워진다. 
따라서 밝게 보는 지혜가 없이는 가랑비에 옷이 젖듯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들어 
삿됨이 원래 내 몸인양 달라붙어 버리고는 결코 다시는 바른 길로 돌아서지 못하게 된다. 


본디 사람이란 짐승이기 때문에 내 몸에 편한 것을 찾아가게 마련이니, 
사사로움이란 그러한 본성에 순(順)하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짐승에게 없는 생각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짐승에게는 없는, 오직 사람에게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병폐가 생긴다. 

동물은 자기 배를 채우고 나면 더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고 안주하기에 자연을 거스르지 않지만, 
사람은 생각이 자기 자신을 속이기 때문에 그 삿됨이 끝간 데 없이 자라날 수가 있다. 
그리고 사람마다 제각각 이러한 욕심이 키우다보면, 서로 싸우고 뺏고 해치게 된다. 
같은 사회 안에서 살아야 함에도 서로 믿을 수 없고, 반목하게 되고, 결국 파멸로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람에게는 이를 막을 수 있는 힘 또한 있다. 
공자가 말하는 서(恕), 자기 자신을 비추어 남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공감능력이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만큼이나, 공감능력은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하다. 
개인의 이기심-삿된 마음(私)-이 생각으로 인해 끝없이 커지는 것을, 
저 사람도 나처럼 고통받지 않고 행복하길 원한다는 것을 앎으로서 막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감은 사람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초가 된다. 

(恕)는 사사로운 마음(私)이 커지는 것을 막아내고 내려놓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삿된 마음을 버리고 항상 진실한 마음(忠)으로 항상 살아갈 수 있다면, 
사람은 본래 어진 마음(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짐승은 다른 개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본능에서 일어나기에 순수하지만 그 한계가 뚜렷하다. 
허나 사람이 생각과 공감을 발판삼아 본능을 뛰어넘어 어진 마음(仁)을 갖게 된다면,
그와 같은 인간의 사랑하는 마음은 그 경계가 끝이 없고, 그 깊이가 잴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이 사사로움(私)을 끝까지 따르면 사람은 짐승으로 태어났으나 짐승보다 못한 자가 된다. 
삿된 생각은 영혼을 황폐하게 한다. 사사로움을 취하다보면 타인을 헤아리는 마음(恕) 또한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공에 도취하여 중독되는 CEO들이 뇌내 호르몬 분비의 균형이 깨져 공감능력을 상실해가는 것이 바로 그 예이다. 
공감능력을 잃는 것, 이는 곧 타인과의 연결고리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자폐증이라면 자기 만의 세계에 갇히기에 다른 이에게 딱히 피해를 줄 일도, 이유도 없다. 
그러나 사사로움에 취해 잘못된 길을 가는 이들의 마음은 외부와의 심리적 유대는 단절되었으나, 
자신의 욕심은 끊임없이 외부세계로 뻗어져 나간다. 이로 인해 결국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사람은 한없이 잔인해질 수 있다. 
따라서 그가 가지고자 하는 권력과 물질이 크면 클수록 자신과 남에게 끼치는 해가 이루말할 수 없이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잘못된 마음씀으로 인해 변해버린 사람의 뇌는 돌이킬 수 없다. 
정신의 변화가 이미 물질의 변화를 초래했기 때문에 불가역적이다.  
결국 다른 무수한 존재들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그의 영혼은 더이상 깊은 행복과 평화를 얻을 수 없고, 
보잘것 없는 얕은 차원의 욕구충족과 쾌락만이 그의 악행의 댓가로 주어질 뿐이다. 

이 짧은 인생, 자신과 남들에게 하지 못할 일만 하다가 죽음 앞에 놓여 초라하고 비루하게 사라져가게 된다. 
아무리 그 겉이 번지르르 한 들 죽음 앞에서 그 의미를 잃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그를 위로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사람은 항상 삿됨(私)을 경계해야 하는 법이고, 
자기자신을 수양하고, 바른 가치를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항시 충(忠)과 서(恕)로 귀결되는 덕목을 벗 삼아 이같은 사람의 본성을 역(逆)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법이다. 

한 마리 짐승으로 태어나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길은 
언제나 거꾸로 거슬러가는 굽이치는 가파른 길이기에
그 길은 항상 험난하고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최상승의 지혜를 깨우친 사람에게는 오직 그 길 밖에 가야한 길이 없을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더 깊고, 더 넓어지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대붕역풍비(大鵬逆風飛) 생어역수영(生魚逆水泳)이란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연유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이는 한없는 어진 마음(仁)에 이르기 위해 살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일생은 자기 내면에 도사리는 삿됨(私)이라는 본성의 극복과, 
세상사람들의 삿됨(私)으로 비롯된 외부세계의 불의와 그로 인한 고통을 없애는 일에 바쳐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여정에서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을 이긴 연후에 외부의 경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먼저 내부의 적을 없애고, 단결해야 하는 이치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아득히 멀어보이는 길의 끝은 언제 다다를 수 있을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삿되고 거짓된 삶이 아닌 바르고 진실된 삶을 살게 되는 날은 언제 올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피안으로 다다라야 한다. 
그 길 밖에는 가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남과 살아감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지만,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는 지혜가 있다면 명약관화하다. 
예수와 부처, 소크라테스와 공자가 평생을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깨우쳤던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Posted by 청공(靑空)
생각2016. 10. 23. 22:05
산 무당도 아니라 죽은 무당의 딸과 그 딸이 대한민국 정부와과 대학이라는 상아탑의 모든 룰을 무너뜨리고, 농락하였음에도... 오직 이화여대의 학생들만 들고 일어나 자신들이 주인임을 밝혔다. 대한민국의 주인들은 아직도 별 일 없이 산다.

몇몇 깨어있는 선하고 정의로운 이들만 외로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갈 뿐이다. 이 나라는 그랬다. 일제의 찬탈에도 그랬고, 반공과 독재의 억압 속에서도 그랬다. 몇몇 소수에게만 모든 걸 맡겨두고, 나는 먹고 살기 바쁘다. 옳은 걸 알아도 어떻게 사람이 바르게만 살겠냐... 하며 외면하고 산다.

자기의 몫이고, 자기의 삶에 관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별 일 없이 산다. 제발 .... 제발.... 이완용도... 박정희도... 두 번 다시 겪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백년이 지나고 오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일제시대 참혹함을 겪은 소녀들은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도 국가의 배신을 겪고 있고, 오십년 전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로 나섰던 젊은이는 노인이 되어서 국가의 손에 목숨을 잃고 그 몸마저 빼앗길 위기에 놓여있다.

그래도 그저 남 일이다. 아이들이 물에 빠져 죽건... 위안부 할머니들이 억울함 속에 하나둘 세상을 떠나건... 국가의 손에 국민이 죽어나가건.... 남 일이다. 국회의원들아.. 문재인아 열심히 해라... 이 나라는 왜 이 꼴이냐.... 그렇게 훈수두곤 별 일없이 산다.

만약 바로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일 중에 하나라도 다른 국가에서 터졌더라면.... 그 정권은 끝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아니... 끝이다. 그런데 이 나라는 그대로 이 모양 이 꼴이다.

왜냐? 주인이 시원찮아서 이 꼴이다. 자기 집 초가삼간이 다 타도 그 곁에 앉아 불구경이나 하고 있는 바보 천치들이 태반이라서 그렇다.

일제도, 독재도 그대로 청산되지 않은 채 남아있으니... 결국 우리가 맞이해야 할 미래는 그와 비슷한 그 무엇이리라....


Posted by 청공(靑空)
생각2016. 9. 13. 05:31



청전 스님 “종교, 타락할수록 군림하려 들어…양심 지키는 마음의 평화가 행복”




"뭣이 중한디?" 어떠한 말과 글이 유행함에 있어 언어 그 자체의 뜻과 힘도 중요하나, 그 언어가 통용되는 사회의 환경 또한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정의를 잃어버린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경향 신문의 달라이라마 곁에서 삼십년을 수행하신 청전 스님 인터뷰를 읽으며 문득 "뭣이 중한디"라는 말이 떠올랐다.


"요즘 행복은 다른 사람 눈에는 멋져 보이는 '밖의 치장'이 잣대이더군요. 어리석은 욕망을 행복으로 압니다. 진정한 행복을 마음의 평화예요. 착하게 살면 됩니다. 세상이 타락했어도 끝까지 양심을 지키면 됩니다. 바른 동기가 없는 삶엔 행복이 이어지지 않아요."


청전 스님의 말이다. 무엇이 진정한 나인가? 무엇이 진정 행복한 삶인가? 무엇이 어떤 것인지 왜 중요한지 모르고서 그걸 어떻게 얻을 것이며, 가진다한들 제대로 쓸 수 있을리가 만무하다.


어리석은 욕망을 행복으로 알고, 양심적이고 선한 삶을 어리석다 생각하는 거꾸로 뒤바뀐 생각이 우리를.. 이 사회를 힘들게 하고 타락시키는 근본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이 유독 심하다고 생각하지만, 비단 한국 뿐만이 아니라 요즘 세상이 그렇다.


일제시대처럼 미쳐돌아가는 시대 속에서도 양심을 끝까지 지키고, 이 나라를 위해 온 삶을 바쳤던 안중근, 안창호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헬조선이라고 우리가 욕하는 이 나라가 그나마 나라다운 나라일 수가 있었다. 독재와 탄압의 시대 속에서 죽어간 이한열, 전태일과 같은 민주투사들이 있었기에 친일 청산조차 못한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 분들이 끝까지 양심을 지키고, 선한 것, 올바른 것을 위해 사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였다. 양심, 선, 정의가 나는 다른 것이라 생각치 않는다. 그리고 겉으로 보이기에 그 분들이 삶이 고난과 비극으로 보일지언정, 진정 그 분들이야말로 행복한 삶을 사셨다고 생각한다.


반면 자신의 부귀와 권력을 위해 나라를 판 이완용, 수많은 시민들을 희생시킨 전두환 등으로 대표할 수 있는 친일파와 독재세력들은 겉보기에는 부유하고 힘을 가진 모습이 개인 입장에선 성공적인 삶으로 생각될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내면은 황폐하고 오염된 불모지와 같고... 그들의 행위와 삶으로 인해 이 사회는 더욱 혼란과 고통을 견뎌야 했음을 확신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변절자, 양심을 버린 이들이 아직도 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고 본다.


어떻게 해야 우리 스스로 진정 행복하고, 이 사회를 올바르게 변화시켜나갈 수 있을까?


나는 개인의 진정한 행복과 행복한 사회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실은 하나이며.. 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선하고 양심을 지키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데서 시작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삶은 무저항의 삶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서 여러 가지 차원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안중근 의사와 안창호 선생처럼... 수많은 민주투사처럼 옳고 바른 것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삶의 태도를 뜻할 것이다.


또한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고, 부단히 자신을 수양하고 발전시키는 것.. 봄에 씨앗을 뿌리는 것처럼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시간을 아끼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그러한 삶을 사는 방법일 것이다.


Posted by 청공(靑空)
생각2015. 10. 25. 06:31
해철이형 히든싱어를 보는데...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분이지만 참 내가 몰랐구나 싶다. 고스트 스테이션도 밤 늦게 공부하면서 즐겨 듣곤 했었는데...

어떻하면 녹음을 잘하는거냐고? 잘!

그리고 넥스트 새로운 보컬인 이현섭씨와 목소리에 관해서 얘기하면서 '목소리의 밀도'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이 사람은 참 깊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얕디 얕은 내가 언제 그렇게 될까 싶지만, 난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Posted by 청공(靑空)
생각2015. 6. 17. 23:26

내가 추구한 정치적 목표는 옳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당을 혁신하고 지역 구도를 타파해 우리 정치를 발전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국회의원 소선거구제와 결선 투표 없는 대통령 선거는 특정 지역을 배타적으로 장악한 거대 정당의 기득권을 철옹성처럼 보호하는 진입 장벽이다. 그 기득권 안에서 직업정치인들은 당원들을 지배하고 동원해 자기의 기득권을 지킨다. 이 정당들이 국민의 삶과 별 관계없는 문제로 끝없는 감정적 대결과 이전투구를 벌이는 한 농어민과 노동자, 영세상공인 등 사회적 약자들은 자기의 요구를 정치와 국가 운영에 반영하기 어렵다. 그러나 기득권을 누리는 거대 정당들이 스스로 진입장벽을 낮추어 새로운 도전자의 진입을 허용하는 선거제도 개혁을 할 리가 없다. 따라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강력한 제3의 정당을 만들어 기존의 지역주의 정당지형을 허물고 정책 경쟁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정치 시대를 열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정치인으로 성공하려고 하기보다는 낡은 정치 그 자체를 상대로 싸웠다. 내가 개혁당, 열린우리당, 참여당,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에 몸담은 것은 모두 국민참여형의 강력한 제3의 정당 없이는 정치 혁신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이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내가 몸담았던 정당은 모두 사라지거나 좌초했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나는 한국정치에 대한 내 진단과 처방이 옳다고 확신하지만 그것이 꼭 옳다는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옳다고 할지라도 다수의 국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기성 정당을 비판하면서도 제3의 정당에 참여하기를 꺼렸다. 나와 뜻을 같이한 사람들도 의지는 드높았지만 국민의 이해를 구하고 신임을 얻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정치에 뛰어든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올바른 목표를 추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잘 해내지 못했다. 제대로 정치를 하려면 가치관이 뚜렷하고, 정책에 밝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기본일 뿐이다. 정치를 잘하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려 다른 사람과 효과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모아 함께 사회적 선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옳은 일을 하려고 했지만 폭넓은 공감과 신뢰를 얻지 못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두가 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로서는 무엇보다 먼저 내 잘못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문제의 핵심은 내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왕왕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해 적대감을 느꼈다. 남이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해 주기를 원하면서도 남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적게 했다. 그렇게 하면 소통과 협력을 이루어내기 어렵다. 어디 정치만 그렇겠는가? 사업을 하든, 기업이나 정부에서 조직 생활을 하든, 일을 잘 하려면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뜻이 아무리 옳아도 사람을 얻지 못하면 그 뜻을 이룰 수 없다.

지난 10년간 정치는 내 직업이었다. 내 일이었다. 그런데 글쓰기와 달리 정치는 내게 일인 동시에 놀이일 수는 없었다. 정치활동의 일상적 과정이 내게는 즐겁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원래 직업이란 안정적 수입을 가져다주는 생업을 의미한다. 적어도 내게는 정치가 생업으로서 적합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왜 정치를 했는가? 내게 정치는 연대solidarity의 한 방법이었다. 연대는 아픔과 기쁨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 손을 잡고 사회적인 선과 미덕을 실현하는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내게 정치는 스무 살에 야학교사를 한 것과 방식만 다를 뿐 본질은 같은 것이었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아포리아, 2013, 185-186쪽)


1. 

유시민 작가는 정치인의 기본소양으로 뚜렷한 가치관과 정책적 능력을 들었고, 
정치를 통해 사회적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 타인과의 효과적인 소통과 협력을 이뤄야 한다고 보았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다가선다면 상대방도 그만큼 멀어질 뿐이라는 통찰은
나에게도 유효하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 

어제 보았던 공부를 함에 있어 필요한 네 가지 덕목으로 충동심의 억제, 집중력, 자기절제, 목표의식이 차례로 제시되었을 때, 
어떤 일의 성사를 위해서는 반드시 가치의 층위와 그에 따른 선후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여실히 느꼈다. 

무분별하게 다가가서는 우연에 의지하는 것 밖에 되질 않는다. 
모래성을 짓고자 할 때도 아래 토대를 튼튼히 하고, 위로 갈수록 가늘게 만듦은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한다. 


Posted by 청공(靑空)
생각2015. 6. 16. 23:42

출처: 유시민 홈페이지 '자유인의 서재' (http://www.usimin.net/?p=123)


누군가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다. “그래, 당신 자신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을 알겠다. 그러면 당신은 구체적으로 무얼 하면서 어떻게 살고 싶은 건가?” 특별한 것은 없다. 무엇보다 먼저 내가 즐거운 일을 하고 싶다. 그 일이란, 배우고 깨닫고 다른 사람과 나누는 작업이다. 아내와 아이들, 어머니와 형제자매들, 삶과 세상에 대해 깊은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적은 수의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

세상과 민중에 대한 추상적 사랑보다는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고 몸으로 껴안는 실제적인 사랑을 더 많이 나누고 싶다. 놀고 싶다. 다시 그림을 그리고, 요가를 배우고 싶다. 북한산 둘레길을 걷고, 추자도에서 감성돔을 낚고,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주말 저녁 축구장과 야구장에서 소리를 지르고 싶다. 내면에서 솟아나는 욕망을 긍정적으로 표출하면서 살고 싶다. 사실 누가 그걸 하지 못하게 막은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내 스스로를 가두어버려서 그렇게 되었다.

나는 또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더 넓게 연대하면서 살고 싶다. 사명감과 의무감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내가 기꺼이 하고 싶고 내가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하고 싶다. 거리에 나갈 수 없었던 2008년 촛불집회가 생각난다. 그 싸움은 광우병 쇠고기가 수입될 위험에 대한 두려움과 국민의 의견을 무시한 대통령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되었다. 시민들은 대통령이 국민의 요구에 귀 기울여 주기를 소망했다. 나는 똑같은 두려움과 분노를 느꼈고 똑같은 소망을 품었지만 거기 나가지 못했다. 인터넷 생중계를 보면서 마음을 보탰을 뿐이다. 정치를 잘못해서 정권을 빼앗긴 세력이라고 비난받는 것이 아팠다. 자칫 사진이라도 찍혔다가는 촛불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한다는 논란을 일으켜 시민들에게 폐를 끼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느꼈다.

그러나 가장 무거웠던 것은 직업정치인이라는 객관적으로 규정되는 나의 ‘정체성’이었다. 나는 현실정치의 맥락에 포획당한 사람이었다. 나의 모든 행위가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른 것으로 규정당하고 해석되는 한 떳떳하고 기쁜 마음으로 사회적 연대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계속 이렇게 산다면 온전하게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을 것 같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아포리아, 2013, 63-64쪽)


1.

이 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추상적인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정의원칙과 합리적 사고가 사회에서 작동하여야 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나라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삶과 그들의 세상을 위해서 헌신했던 사람이 현실세계에서의 한계로 인해 국가적 의사결정의 참여자 혹은 관계자인 공인의 삶에서 일반 국민으로서의 자연인의 삶을 선택한 것이 아쉽다. 

추구하는 가치과 권력과 돈 뿐이라면 게임의 룰 또한 그 수준에서 정립될 것이다. 추상적인 가치도 없고, 인본적인 가치 또한 없으며, 도덕과 윤리조차 없다. 있어보인다 하여도 그것은 목적적 가치가 아닌 도구적 가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와 메르스의 문제는 정파를 떠난 국가적인 문제임에도... 그 한계는 여전하다. 어떻게 변화를 일궈야할 것인가... 요원해보인다. 나는 아직 현명하지 않다. 



Posted by 청공(靑空)
생각2015. 6. 10. 18:09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 말도 위로를 준다. 우리 현대사에서 아프지 않은 청춘은 없었다. 내 할아버지 세대는 청춘기에 나라를 빼앗겼다. 아버지 세대는 일제의 징용 징병과 한국전쟁을 겪었다. 내 세대는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와 혹심한 노동 착취에 시달리면서 청춘을 보냈다. 어느 세대의 청년들도 망국과 전쟁과 독재에 대해 책임질 일을 한 적이 없었지만, 어떻게든 그 고통을 견디면서 의미 있고 존엄한 삶을 찾으려 분투했다.

오늘의 청년들 역시 자기 책임이 아닌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다. 평생이 하루라면 20대 청년의 인생 시계는 이제 겨우 오전 9시에 왔을 뿐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고 노력하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니 절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라.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면 아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위로의 힘은 거기까지다. 아버지가 아들의 아픔을 대신해줄 수는 없다. 아픔을 견디는 능력을 상속해줄 방법도 없다.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혀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아포리아, 2013, 55-56쪽)


출처: 유시민 홈페이지 '자유인의 서재' (http://www.usimin.net/?p=1)


아버지는 아들의 아픔을 대신해줄 수 없고, 아픔을 견디는 능력을 상속해줄 방법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고, 그 삶의 지평 위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운명자이다.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나 또한 걷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이자 용기이다. 
그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꿋꿋한 나무가 될 수 있음을 나는 안다. 
믿는다라는 말은 안다라는 말 앞에서 초라해진다. 
보일 것 같다와 보인다라는 말의 차이와 같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 서 있고, 내 인생의 주인은 여기 있으며, 그 주인이 살아야 하는 삶 또한 여기 펼쳐져 있다. 
그 앞에서 돌아감이란 이제 다시는 없으리라. 

Posted by 청공(靑空)
생각2015. 5. 21. 07:01

거기 울고 지친 아름다운 당신
잊지 말아요.

어둡고 캄캄한 밤길 너머
해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어요.

정신없이 지나가는 하루 동안
별들이 그대를 지켜보고 있고요.

그리고 우주보다 멀리 있어도
나는 그대를 항상 사랑한답니다.

그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앞으로 셀 수 없는 날이 지나도
언제나,

잊지 말아요.

해가 뜨고 별이 뜨면
그대 사랑받고 있음을.

Posted by 청공(靑空)
생각2015. 5. 10. 09:20

우연히 불후의 명곡을 보다가 마이클잭슨의 "Heal the World"를 들었어요. 
그 후로 계속 마이클잭슨의 노래를 찾으며 들으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네요. 

왜 흘렸는지는 모르겠어요. 여러가지 많은 생각이 들었고 깨달았는데, 
함께 나누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진부한 이야기일꺼에요. 그런데 언제나 진부한 그것에 다가갈 수는 없더라고요. 
네 이웃을 사랑해라.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해라(홍익인간), 지옥에 있는 중생들까지 모든 중생을 구원해라. 
어떤 생각인지 아는데 거기에 못 도달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나(Ego)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로만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죠. 
이 것도 진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어요. 누구나 뻔히 알고 있는 이야기니 말이죠. 

그런데 노래를 계속 듣다보니 You and for Me라는 가사가 가슴에 들어오더군요. 
저기에서 나보다 너(You)가 먼저죠. 다들 알아요. 하지만 다들 Me and for You인 삶을 살죠. 

그리고 마이클이 노래부르는 중간에 계속 I love You라고 해요. 
우리도 그렇게 얘기하죠. 하지만 대부분들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You love me? I love You 하는 삶을 살죠. 
자기 연인.. 아니 자기 연인한테도 그러지는 않을꺼에요. 기껏해야 자기 자식 정도겠죠. 
그렇더라 하더라도 종종 I love You, You love Me? 라는 꽁무니를 붙여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 당신도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다하는 마음을 사람인 이상 버리기가 힘들어요. 

그렇지만 진정한 사랑은 내가 없어져야 돼요. 

그래서 사람들이 진정한 마음을 가질 수 없고, 진정한 삶을 살 수가 없는거에요.
자기 자식에게만이라도 내가 없는 사랑을 항상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고, 
그 자식은 세상 누구보다 큰 선물을 받고 아름답게 자랄꺼에요. 

돈이나 물질같은 것보다 사랑이 더 큰 것임을 우리는 살면서 항상 느끼고 갈구하는 바이죠. 


사실 내가 있어서 두려움도 생겨요. 사랑과 내 존재 사이에 '나'라는 게 끼면 사랑이 사랑이 아니게 돼요. 
원함이죠. 욕망이에요. 나도 사랑받겠다는 욕망. 당연한 것 같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면 두려울 것이 없어요. 그리고 내가 줄 수 있는 것도 다 줄 수 있고요. 
많은 사람들에게는 사랑하게 되면 바보같이 다 퍼주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오해나, 
그러다가 나만 다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지요.  

이러한 생각은 물질을 마음보다 중요시하거나, 나라는 환상이 있기 때문이에요.
마음이 물질보다 중요한 사람에게는 물질은 도구일 뿐이죠. 예수님과 부처님같은 사람들도 그랬지만, 
가까운 예로 테레사 수녀나, 위에서 얘기한 마이클잭슨에게도 물질은 물질 그 자체로 의미가 없어요. 
이런 사람들에게는 물질은 물질 이상의 의미를 갖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답니다. 

물질에 진정한 마음을 담아서 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요. 
우리가 연인이나 가족에게 선물을 할 때만 해도, 마음을 담은 선물을 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모르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전하며 마음을 전하는 차원이란 쉽지 않죠. 

주면 내가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의 근저에는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봐요.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음으로써 행복해서 그것을 주기 싫다는 마음이나, 
그것을 줌으로써 상대방이 주는 반응에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겠죠. 
두 가지 경우 모두 외부조건에 자신의 행복의 가능성이 좌지우지될 수 있기 때문에 불완전해요. 

그래서 행복은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 없어요. 만족하게는 할 수 있을지라도. 
행복은 조건이 붙어요. 항상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만 행복할 수 있어요. 
'내'가 있는 상황에서만 말이죠. 

그러나 사랑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죠. 주는 것 그 자체, 사랑하는 것 그 자체에서 
만족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어떤 것이 더 나은 삶인지 아주 쉬운 일이지만, 그렇게 살기란 쉽지 않죠.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겠죠. 

그러나 우리는 분명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해요. 
모든 것을 사랑하면 무엇도 해칠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이 행복한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이죠. 

하지만 한계는 언제나 있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지 않는 한, 그 사람들은 우리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우리는 사랑을 함으로써 완전해지고 행복해지는 반면, 
그들은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어쩌면 우리를 통해서 진정한 삶을 살 가능성을 얻을 수 있을꺼에요. 

달라이라마와 티벳이 제게는 그 사례가 될 것 같네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깊이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진정한 사랑을 얻어야 진실한 자유와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그 곳으로 가는 길은 사랑일수도, 깨달음일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내'가 없어지면 그곳에는 어떻게든 이른다는 것이겠죠. 


언제나 사랑을 하는 삶에 대해서 표현하자면 영어보다는 우리말이 낫겠다 싶어요. 
주어를 안 써도 어색하지가 않거든요. 

사랑합니다.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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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공(靑空)
생각2015. 3. 6. 06:09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泰山雖高是亦山 (태산수고시역산)

登登不已有何難 (등등불이유하난)

世人不肯勞身力 (세인불긍노신력)

只道山高不可攀 (지도산고불가반)


- 陽士彦(양가언) -


산을 오르는 것은 쉽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산을 오르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우리네 인생이 이 보이지 않는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올라가도 얼마나 올라갔는지 모르니, 

지쳐 주저앉아서 생각하면 쉬이 뜻이 꺽여

이 산이 아닌가 싶어 포기하곤 다시 내려오기 일쑤다.


욕심과 어리석음이 숲처럼 무성히 자라나 

전망을 보일 새도 없이 가리우니 볼려고 해봐야

바로 눈 앞밖에 볼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이리저리 떠돌다보면 점점 힘이 빠지고 아프고 늙어간다. 

바보처럼 발 밑만 보며 걸어가는게 나을 수도 있다. 

가장 높은 산이 아니어도 자기가 정한 산을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기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참을 수 없고, 

숲이 우거져 햇볕을 받지 못하면 몸도 마음도 점점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산을 제오르지 못하고 뫼만 높다한다. 

Posted by 청공(靑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