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2016. 2. 8. 06:22

오늘 독일에 와서 두번째로 미사를 참석하였다. 
스무살 이후로 성당에 가지 않았던 이유는 신앙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성당에서의 강론과 성당 사람들의 모습에서 느끼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대학 옆에 있는 예수회 성당을 나가고 있는데, 
처음 미사를 갔을 때는 코린토 1장 13절의 '사랑'에 관한 독서가 있었고...
오늘은 제1독서로 이사야서, 복음으로 루카복음이 강독되었다. 

이사야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가 여기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소서(Ich bin hier, sende mich)"라고 한 구절과...
베드로가 고기를 낚던 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던진 뒤에 만선을 이루고, 두려움 혹은 경외에 차 "선생님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어본 뒤, 예수님의 뒤를 따른 이야기가 인상이 깊었다. 

군대에서, 그리고 삶에서 내가 힘든 때마다 중고등학교 시절 성당에서 성가대를 하며 불렀던 구절이 나를 지탱해준다.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독일 신부님의 강론에서 곧 있을 카니발(사육제)를 맞이하는 지금...
즐거움(Spaß)를 쫓지 말고, 기쁨(Freude)를 찾으라는 말이 있었다. 

즐거움은 외부에서 오지만, 기쁨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이며...
그러한 마음에는 의심이 없고, 평화와 고요함이 함께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돌이켜보면 가벼운 것들, 밖에서 오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였고...
항상 깊은 것을 추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남들이 모르도록, 혹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면서 저당잡힌 삶을 살았다. 

깊어질 턱이 없으니, 때가 와도... "제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을리가 만무하고, 
더 나아가 "나를 보내주소서"라는 소명을 실천할 가능성이 있었겠는가? 

결국 내 자신이 이익이 되는 일이지만 일이 안 풀릴 때 기적을 바라는 삶을 살지 않았는가? 
노력도 하지 않았으면서, 스스로 바뀌지도 않았으면서 무엇을 얻으려 하였는가? 

스스로도 구원되지 못한 이가,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사육제가 지나면 사순절이 온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동안 단식을 하며 기도를 드렸고, 
부처님은 6년의 고행 뒤에 7일의 선정을 하신 끝에 깨달음을 얻으셨다. 

맑아지지도, 자유로워지지도 못하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버려야 할 때가 왔다. 


여기서도 버리지 못한다면 내 생애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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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공(靑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