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2015. 6. 12. 02:59

출처: 정민교수님의 '옛사람 내면풍경' (http://jungmin.hanyang.ac.kr/)

까마귀의 날갯빛

菱洋詩集序 


통달한 사람은 괴이한 바가 없지만 속인은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고 보니 괴이한 것도 많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통달한 사람이라 해서 어찌 사물마다 눈으로 직접 보았겠는가? 
하나를 들으면 눈 앞에 열 가지가 떠오르고, 열을 보면 마음에서 백 가지가 베풀어져, 천 가지 괴이함과 만 가지 기이함이 도로 사물에 부쳐져서 자기와는 간여함이 없다. 때문에 마음은 한가로와 여유가 있고 응수함이 다함이 없다. 
그러나 본 바가 적은 자는 백로를 가지고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가지고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사물은 절로 괴이할 것이 없건만 자기가 공연히 화를 내고, 한 가지만 같지 않아도 온통 만물을 의심한다. 
達士無所怪, 俗人多所疑. 所謂少所見而多所怪也. 夫豈達士者, 逐物而目覩哉. 聞一則形十於目, 見十則設百於心, 千怪萬奇, 還寄於物, 而己無與焉. 故心閒有餘, 應酬無窮. 所見少者, 以鷺嗤烏, 以鳧危鶴. 物自無怪, 己迺生嗔, 一事不同, 都誣萬物.

아! 저 까마귀를 보면 깃털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그러나 홀연 유금乳金 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석록石綠 빛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하더니 비췻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또한 괜찮을 것이다. 저가 본디 정해진 빛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어찌 그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리오.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 버린다. 
噫! 瞻彼烏矣, 莫黑其羽. 忽暈乳金, 復耀石綠, 日映之而騰紫, 目閃閃而轉翠. 然則吾雖謂之蒼烏, 可也, 復謂之赤烏, 亦可也. 彼旣本無定色, 而我乃以目先定. 奚特定於其目? 不覩而先定於其心. 

아! 까마귀를 검은 빛에 가두었으면 충분한데도, 다시금 까마귀를 천하의 온갖 빛깔에다가 가두었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검다. 그러나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르고 붉은 것이 그 빛깔[色] 가운데 깃든 빛[光]인 줄을 알겠는가? 검은 것[黑]을 일러 어둡다[闇]고 하는 자는 단지 까마귀를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아니라 검은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물은 검기[玄] 때문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칠[漆]은 검은[黑] 까닭에 능히 거울이 될 수가 있다. 이런 까닭에 빛깔 있는 것 치고 빛이 있지 않는 것이 없고, 형상[形] 있는 것에 태態가 없는 것은 없다. 
噫! 錮烏於黑足矣, 迺復以烏錮天下之衆色. 烏果黑矣, 誰復知所謂蒼赤乃色中之光耶? 謂黑爲闇者, 非但不識烏, 竝黑而不知也. 何則? 水玄故能照, 漆黑故能鑑. 是故有色者莫不有光, 有形者莫不有態. 

미인을 보면 시를 알 수가 있다. 그녀가 고개를 숙임은 부끄러운 것이다. 턱을 괸 것은 한스러움을 나타낸다. 홀로 서 있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눈썹을 찌푸림은 근심스러운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림이 있을 때에는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바라는 바가 있을 때는 파초 아래 서 있는 모습으로 보여준다. 
만약 그 서 있는 모습이 재계齋戒한 것 같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빚어놓은 것 같지 않다고 나무란다면, 이것은 양귀비가 이빨이 아파 찌푸림을 나무라는 격이요, 번희樊姬가 쪽진 머리를 감싸 쥠을 못하게 하는 격이며,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의 아름다움을 야단하고, 손뼉치며 추는 춤의 경쾌하고 빠름을 꾸짖는 격이라 하겠다. 
觀乎美人, 可以知詩矣. 彼低頭, 見其羞也; 支頤, 見其恨也; 獨立, 見其思也; 顰眉, 見其愁也; 有所待也, 見其立欄干下; 有所望也, 見其立芭蕉下. 若責其立不如齋, 坐不如塑, 則是罵楊妃之病齒, 而禁樊姬之擁髻也, 譏蓮步之妖妙, 而叱掌舞之輕儇也. 

내 조카 종선宗善은 자가 계지繼之인데 시에 능하다. 한가지 법도에만 얽매이지 아니하여 온갖 체를 두루 갖추었으니, 우뚝히 동방의 대가가 된다. 성당盛唐의 시인가 싶어 보면 어느새 한위漢魏의 시가 되고 또 송명宋明의 시가 된다. 겨우 송명인가 싶어 보면 다시금 성당으로 돌아가 있다. 
아아! 세상 사람들이 까마귀를 비웃고 학을 위태롭게 여김이 또한 너무 심하도다. 그러나 계지의 동산에는 까마귀가 자줏빛도 되었다가 비췻빛도 된다. 세상 사람들은 미인을 재계한 듯 빚어놓은 듯 만들고 싶어하지만 손뼉치며 추는 춤과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는 날로 경쾌해지고 더 아름다워 질 터이고, 틀어올린 머리와 아픈 이빨은 모두 나름대로의 태가 있는 법이다. 그 성내고 노함이 날로 심해질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구나. 
세상에는 통달한 선비는 적고 속인만 많다. 그럴진대 침묵하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으나, 그런데도 말을 그만 둘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일까? 아! 연암노인은 연상각烟湘閣에서 쓰노라. 
余侄宗善字繼之, 工於詩, 不纏一法, 百體俱該, 蔚然爲東方大家. 視爲盛唐, 則忽焉漢魏, 而忽焉宋明. 纔謂宋明, 復有盛唐. 嗚呼! 世人之嗤烏危鶴, 亦已甚矣. 而繼之之園, 烏忽紫忽翠. 世人之欲齋塑美人, 而掌舞蓮步, 日益輕妙, 擁髻病齒, 俱各有態. 無惑乎其嗔怒之日滋也. 世之達士少而俗人衆, 則黙而不言, 可也. 然言之不休, 何也? 噫! 燕岩老人書于烟湘閣.


달사達士와 속인의 차이를 어디에서 찾을까? 처음 보는 어떤 물건이나 경험해보지 않았던 어떤 일을 그 앞에 두어 보면 금세 구별할 수가 있다. 달사는 이미 익숙히 알았던 일이기라도 한듯이 침착하게 당황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속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들은 도대체 자기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않은 일을 받아들일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처음 보기는 둘다 마찬가진데 한쪽은 속수무책으로 당황하여 화를 내고, 다른 한쪽은 태연자약 능수능란하게 처리해 버린다. 왜 그럴까? 
달사란 어떤 사람인가?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를 들으면 이미 그의 눈 앞에는 그와 관련된 열 가지 형상이 떠오른다. 그가 들은 것은 하나인데 그는 벌써 열 가지를 알아버린다. 열을 보면 마음 속에서는 이미 백 가지 일이 펼쳐진다. 세상의 그 많은 신기하고 괴이하고 알 수 없는 일들도 그의 귀와 눈을 거쳐가면 어느새 평범하고 익숙한 사물로 변해 버린다. 그는 자신의 이목만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사물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한다. 그의 귀와 눈, 그의 마음은 단지 이 사물과 저 사물을 연결지워주는 매개자의 역할만을 기쁘게 감당한다. 그러기에 어떤 난처한 상황도 그는 당황스럽지가 않고, 어떤 복잡한 문제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 그런 그를 나는 달사, 즉 통달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속인은 그렇지가 않다. 그는 자기가 아는 세계를 통해서만 창밖의 세계를 이해하려든다. 그는 사물로써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아我의 집착을 우선하여 사물을 재려든다. 백로의 고결을 높이 치다 보니 까마귀의 더러움을 비웃는다. 오리의 짧은 다리만 보다가 학의 긴 다리를 보면 위태롭기 그지 없다. 그들은 학의 긴 다리를 오리처럼 짧게 해야만 마음이 놓인다. 검은 까마귀의 깃털을 백로의 그것처럼 만들어 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새울세라
청강淸江에 조히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검은 까마귀가 무슨 잘못이 있던가? 외다리로 고고히 서 있는 해오라비, 그 청순한 고결을 사람들은 아름답다 하지만 정작 그는 지금 주린 제 뱃속을 채우려고 물 속의 고기를 한껏 노리고 있는 중이다. 까마귀의 반포지은反哺之恩은 어떨까? 늙은 제 어미를 위해 먹이를 토해내는 그 갸륵한 마음도 같이 욕을 해야할까? 까마귀는 검은 날갯빛을 하고도 제 삶을 불편함 없이 잘 살아간다. 그것을 보고 불편한 것은 정작 까마귀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것을 보고 행복한 것은 사실 해오라비가 아니라 사람이다. 왜 까마귀를 더럽다 하는가? 해오라비가 고고할 것은 또 무엇인가? 왜 내가 알고 있는 사실, 내가 믿고 있는 가치만을 고집하는가? 왜 그것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욕하는가? 
까마귀의 날갯빛은 정말 검을까? 아니 그보다 검은 것은 정말 나쁜 것일까? 가만히 보면 까마귀의 날개 속에는 갖가지의 빛깔이 감춰져 있다. 유금빛으로 무리지다가 석록빛으로 반짝이고, 햇빛 속에서는 자줏빛도 떠오른다. 자세히 보면 비췻빛도 있구나. 우리가 검다고만 믿어온 그 깃털 속에 이렇듯 다양한 빛깔이 들어 있었구나. 비췻빛 까마귀였다면 우리가 그렇게 미워했을까? 푸른 까마귀라면 그렇게 경멸했을까? 햇살의 프리즘에 따라 바뀌는 까마귀의 날갯빛을 우리는 거부하고 있었구나. 까마귀는 검다. 까마귀는 검다. 검은 것은 더럽다. 더러운 것은 지저분하다. 지저분한 것은 음험하다. 까마귀는 지저분하다. 까마귀는 음험하다. 가까이 가면 물드니 백로야 가지마라. 
한 스킨 스쿠버가 깊은 바다에서 작살로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 피가 초록빛이었다. 하도 신기해 자랑하려고 서둘러 물 위로 올라오니 그저 보통의 붉은 피였다. 햇빛의 장난에 깜빡 속은 것이리라. 물고기의 피는 붉은 색인가? 아니면 초록색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는 언제나 불변인가? 변화하는 것은 진리가 아닌가? 피는 붉다. 까마귀는 더럽다. 속인은 모든 판단을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러기에 깊은 바다 속에서 초록색으로 보이는 피의 빛깔이 신기하고, 검은 빛 속에 언뜻언뜻 떠오르는 석록빛을 인정할 수가 없다. 까마귀는 저대로 자유로운데 공연히 제가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른다. 온 세상 사람들을 해오라비로 만들어야만 제 사명이 다할 줄로 생각한다. 그래서 남을 못살게 굴고, 비난하고 강요한다. 
그리고 나서 연암은 비로소 본론을 꺼낸다. 그가 제기하는 문제는 색色과 광光, 형形과 태態의 관계이다. 색깔 속에는 스펙트럼이 빚어내는 다양한 광채가 있다. 하나의 꼴 속에는 수없이 많은 태가 깃들어 있다. 속인과 달사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속인은 색과 형만 가지고 사물을 판단한다. 그러나 달사는 그 속에 깃든 광과 태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이편에서 괴이쩍은 일이 저쪽에서는 당연한 것이 되고, 이편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저쪽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일로 된다. 
검다는 것만 가지고 다시 살펴 보자. 검은 색에도 여러 가지 광光이 깃들어 있다. 검다는 것이 환기하는 의미에는 어둡다, 시커멓다, 더럽다, 음험하다, 현묘하다, 마음씨가 나쁘다 등등의 다양한 층위가 있다. 까마귀는 더럽다고 할 수 있다면, 까마귀는 현묘하다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속인은 그럴 수가 없다. 다시 연암은 검다는 말을 흑黑·암闇·현玄·칠漆 등으로 분절한다. 검다고 사물을 다 비추지는 못한다. 옻칠만이 사물을 비출 수 있고, 수면의 검은[玄] 빛 만이 사물을 비출 수 있다. 검은 옷은 사물을 비추지 못하고, 어둠도 사물을 비추지는 못한다. 단지 검다는 말 속에도 뜻밖에 이렇듯 다양한 의미망이 존재하고 있다. ‘검다’라는 단어를 선입견을 가지고 보지 말아라. 그 색에 현혹되지 말고, 그 빛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꼴 속에는 다양한 태가 깃들어 있다. 나는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다. 기쁠 때 웃는 나와 분노로 성내는 나는 다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아닌가? 아버지로서 근엄하게 야단치는 내가 있고, 자식으로서 공손히 순종하는 내가 있다. 교실에서 강의할 때의 나와, 스승 앞에서 가르침을 청할 때의 나는 내가 보기에도 판이하다. 이럴 때 나는 나인가? 그 다양한 태態를 나는 인정하며 살아간다. 그것을 융은 퍼소나persona라 이름짓고, 시인은 시적 화자라 부른다. 내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나,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좀전과 지금이 같지 않은 나, 그 많은 나들을 나는 나라고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나 속인은 싸늘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 속에서 진정한 단 하나의 나, 나다운 나, 완성된 나를 찾아야만 할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제 연암은 형形과 태態의 관계를 부연하기 위해 미인을 끌어들인다. 그림 속에 그려진 미인은 다양한 동작을 취하고 있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구나. 그녀는 지금 부끄러운 것이다. 턱을 괴고 넋을 놓고 있구나. “내 님은 누구실까? 어디 계실까?” 그녀의 마음은 이런 것이었을게다. 달빛 아래 홀로 선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멀리 떠나간 님을 향한 그리움을 읽는다. 아! 그녀가 눈썹을 찡그리고 있다. 알지 못할 미래에 대한 불안이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그늘을 드리운 것이다. 높은 난간에 올라 먼데를 바라보는 그 뜻은 님이 이제나 저제나 오실까 해서임을 나는 안다. 파초 그늘 아래서 위를 올려다 보는 그녀. 그녀는 무언가 잘 이뤄지지 않는 바램을 지니고 있구나. 
만약 그 많은 미인도의 모습이 한결같이 금세 깨끗이 재계하고 나온 듯 하고, 흙으로 빚어놓은 조각처럼 단정해야만 한다고 우긴다면, 나는 그런 사람과 더불어 그림을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 미인은 단정해야 한다. 덕성이 넘쳐흘러야 한다. 서 있는 것도 앉아 있는 것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그런 미인을 나는 진흙으로 빚은 미인이라고 부르련다. 형形만 있고 태態는 없는 미인은 미인이 아니다. 분칠한 아름다움만으로는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예쁘고 화려한 옷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자태가 있어야 한다.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태에서 나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반대로 우리는 그림 속 미인의 자태를 보고 그녀의 속마음을 읽어낼 수가 있다. 하나의 몸짓 속에 서로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청나라 때 장조張潮는 《유몽영幽夢影》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습이 추한대도 볼 만한 사람이 있고, 비록 추하지 않지만 볼 만한 구석이라곤 없는 사람이 있다. 글이 문리는 통하지 않아도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있고, 비록 문리는 통하지만 지극히 혐오스러운 것도 있다. 이것은 천박한 사람에게는 쉽게 알려주지 못하는 이치이다. 
貌有醜而可觀者, 有雖不醜而不足觀者; 文有不通而可愛者, 有雖通而極可厭者. 此未易與淺人道也. 

사람들은 형만 보고 태는 보지 않는다. 겉모습에만 현혹된다. 그래서 언제나 허전하다. 늘 속고만 산다. 치통을 앓아 뺨에 한 손을 가볍게 대고서 살짝 찌푸린 양귀비의 표정은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 슬픈 이야기에 젖어 촛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쪽진 머리를 매만지는 번희樊姬, 그녀의 눈가를 촉촉히 적시는 눈물은 얼마나 고혹적이었을까? 그녀에게 왜 빚어 놓은 듯이 단정하게 앉아 있지 않느냐고 나무랄 것인가? 그녀더러 어째서 얌전히 머리를 길게 늘이지 않느냐고 야단할 것인가? 그래도 화가들은 굳이 ‘양비병치도楊妃病齒圖’를 즐겨 그리고, 연극 작가들은 번희의 쪽진 머리 매만지던 일을 소재로 희곡을 썼다(청나라 서위舒位는 《번희옹계樊姬擁髻》라는 희곡을 남겼다). 사뿐사뿐 걸어가는 여인의 요염한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점잖치 못하다고 무조건 나무랄 것인가? 장중한 아악雅樂의 정무正舞만을 옳다하여 빠른 박자로 손뼉치며 휘휘 돌아가는 북방 호무胡舞의 날렵하고 경쾌한 춤사위를 거부할 것인가? 
연암은 이제 글을 마무리 한다. 내 조카 종선의 시 속에는 다양한 광光과 태態가 담겨 있다. 따라서 한가지 색色과 한가지 태態만을 기호하는 자들은 그의 시를 비웃으리라. 그러나 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를 동방의 대가라고 부르고자 한다. 해오라비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가지고 학을 위태롭게 여기는 자들은 이를 하찮게 여겨 분노하고 성낼테지만, 나는 그의 자줏빛 까마귀와 비췻빛 까마귀를 사랑한다. 세상 사람들은 판에 박은 미인의 모습만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정작 그들이 사랑하는 미인은 피가 돌고 살이 부드러운 미인이 아니라, 진열장의 마네킹일 뿐이다. 
나는 언제 들어도 트롯트 가요가 좋은데 TV에서는 허구 헌 날 랩 송과 댄스 음악만을 틀어대고 있으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다. 주변 사람에게 저것도 노래냐고,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저 지경이냐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다. 배꼽티는 날로 노출이 심해질 것이고, 청소년 문제는 갈수록 점입가경일 것이다. 언제나 세상은 곧 내일 망할 것 같은 말세였었다. 젊은이들은 항상 버르장머리가 없었다. 연암의 그때도 그랬고, 지금의 여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아직 세상이 망했다는 소식이 들리질 않고, 젊은이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건강하게 성장해간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색色만 보고 광光은 외면하고, 형形만 볼뿐 태態는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데 있다. 연암은 《열하일기》 중 〈망양록亡羊錄〉에서 이에 대해 다시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근세의 잡극 중에 〈서상기西廂記〉를 공연하면 지루해서 졸음이 오는데, 〈모란정牧丹亭〉을 공연하면 정신이 번쩍 들어 귀 기울여 듣는다. 이것은 비록 여항의 천한 일이지만 백성들의 습속과 취향이라는 것이 때에 따라 옮기어 바뀐다는 것을 증거하기에 충분하다. 사대부가 옛 음악을 회복하려고 마음 먹고서 가락과 곡조가 바뀐 것은 모르고서 이에 갑자기 쇠북과 피리를 부수고 고쳐서 원래의 소리를 찾고자 한다면 사람과 악기가 모두 없어지기에 이를 것이다. 이것이 어찌 화살을 따라가서 과녁을 그리고, 술 취함을 미워하면서 억지로 술 마시게 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如近世雜劇, 演西廂記, 則捲焉思睡; 演牧丹亭, 則洒然改聽. 此雖閭巷鄙事, 足驗民俗趣尙, 隨時遷改. 士大夫思復古樂, 不知改腔易調, 乃遽毁鍾改管, 欲尋元聲, 以至人器俱亡. 是何異於隨矢畵鵠, 惡醉强酒乎?

정곡을 꿰뚫는 명궁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고 화살이 맞은 곳마다 쫓아가서 과녁을 설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화살이 과녁을 찾아가야지, 과녁이 화살을 찾아가는 법이 없다. 표적이 바뀌면 조준이 달라지듯, 시대가 바뀌면 취향도 바뀐다. 내가 쏘는 화살만은 반드시 과녁을 뚫어야 된다는 법이 없다. 여기서 억지가 생기고 무리가 따른다. 이미 달라진 옛 음악을 이제와 복원하려 한들 가능키나 하겠으며, 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원래의 소리란 없다. 당시에는 그것도 변화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이다. 있지도 않은 원래의 소리 때문에 지금 귀에 익은 소리를 버릴 수는 없다. 술 취해 비틀대는 꼴이 보기 싫거든 아예 술을 멀리할 일이다. 그런데 왜 싫은 술을 억지로 마시고 싫다는 술을 굳이 권하는가? 
아! 세상에는 달사를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속물들의 속물 근성만 힘을 발휘하는 세상이다. 차라리 입을 닫고 침묵하리라. 그러면 그들의 노여움을 모면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입을 열어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 그러나 막상 말하고 나니 답답하구나. 시인들이여! 그대들이 사물을 바라보는 형편은 어떠한가?


1. 

하나의 색(色) 속에 깃들어 있는 온갖 빛깔(光)을 볼 수 있고, 
하나의 형상(形) 안에서 풀어져나가는 무수한 태(態)를 보아야 한다. 

제대로 본 바가 적은 사람은 세상 온갖 것들을 자기가 가진 부족함으로 보려하니 
어그러지고 곡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통달한 사람은 언제나 정곡을 꿰뚫는다.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사물을 사물로서 볼 수 있고, 
사건을 사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소인들은 자기를 통해 세상을 보지만, 도인은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 
눈 뜨고도 눈 감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태에서 나오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색과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묘한 법을 볼 수 있으리라. 


"모습이 추한대도 볼만한 사람이 있고, 비록 추하지는 않지만 볼만한 구석이 없는 사람이 있다."



Posted by 청공(靑空)
동양철학2015. 6. 10. 19:01

출처: 정민교수님의 '옛사람 내면풍경' (http://jungmin.hanyang.ac.kr/)


이미지는 살아 있다, 코끼리의 기호학

象記

장차 괴상하고 진기하고 대단하고 어마어마한 것을 보려거든 먼저 선무문宣武門 안으로 가서 코끼리 우리를 살피면 될 것이다. 내가 황성皇城에서 코끼리 16마리를 보았으나, 모두 쇠로 만든 족쇄로 발을 묶어 두어 그 움직이는 것은 보지못하였었다. 이제 열하熱河 행궁行宮의 서편에서 코끼리 두 마리를 보매, 온몸을 꿈틀대며 움직이는데 마치 비바람이 지나가는 듯 하였다. 
將爲怪特譎詭恢奇鉅偉之觀, 先之宣武門內, 觀于象房可也. 余於皇城, 見象十六, 而皆鐵鎖繫足, 未見其行動. 今見兩象於熱河行宮西, 一身蠕動, 行如風雨. 

내가 일찍이 새벽에 동해 가를 가다가 파도 위에 말같은 것이 수도 없이 많이 서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모두 봉긋하니 집과 같아 물고기인지 짐승인지 알지 못하겠길래 해 뜨기를 기다려 자세히 보려 했더니, 막상 해가 바다 위로 떠오르려 하자 파도 위에 말처럼 섰던 것들은 하마 벌써 바다 속으로 숨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제 열 걸음 밖에서 코끼리를 보고 있는데도 오히려 동해에서의 생각이 떠올랐다. 
余嘗曉行東海上, 見波上馬立者無數. 皆穹然如屋, 弗知是魚是獸, 欲俟日出, 暢見之, 日方浴海, 而波上馬立者, 已匿海中矣. 今見象於十步之外, 而猶作東海想. 

그 생김새가 몸뚱이는 소인데 꼬리는 나귀 같고, 낙타 무릎에다 범의 발굽을 하고 있다. 털은 짧고 회색으로, 모습은 어질게 생겼고 소리는 구슬프다. 귀는 마치 구름을 드리운 듯 하고, 눈은 초승달 처럼 생겼다. 양쪽의 어금니는 크기가 두 아람이나 되고, 길이는 한 자 남짓이다. 코가 어금니보다 더 길어서 구부리고 펴는 것은 자벌레만 같고, 두르르 말고 굽히는 것은 굼벵이 같다. 그 끝은 누에 꽁무니처럼 생겼는데, 마치 족집게처럼 물건을 끼워가지고는 말아서 입에다 넣는다. 
其爲物也, 牛身驢尾, 駝膝虎蹄. 淺毛灰色, 仁形悲聲. 耳若垂雲, 眼如初月. 兩牙之大二圍, 其長丈餘. 鼻長於牙, 屈伸如蠖, 卷曲如蠐. 其端如蠶尾, 挾物如鑷, 卷而納之口. 

혹 코를 주둥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어, 다시금 코끼리의 코가 있는 곳을 찾기도 하니, 대개 그 코가 이렇게 길 줄은 생각지도 못하는 것이다. 간혹 코끼리는 다리가 다섯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혹은 코끼리 눈이 쥐눈과 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 온 마음이 코와 어금니 사이로만 쏠려서 그 온 몸뚱이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을 좇다 보니 이렇듯 앞뒤가 안맞는 비유가 있게 된 것이다. 대개 코끼리의 눈은 몹시 가늘어 마치 간사한 사람이 아양을 떨 때 그 눈이 먼저 웃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 어진 성품이 바로 이 눈에 담겨 있다. 
或有認鼻爲喙者, 復覓象鼻所在, 蓋不意其鼻之至斯也. 或有謂象五脚者. 或謂象目如鼠, 蓋情窮於鼻牙之間, 就其通軆之最少者, 有此比擬之不倫. 蓋象眼甚細, 如姦人獻媚, 其眼先笑. 然其仁性在眼.

강희康熙 때에 남해자南海子에 사나운 범 두 마리가 있었다. 오래 되어도 능히 길들이지 못하자, 황제가 노하여 범을 몰아다가 코끼리 우리로 들여보낼 것을 명하였다. 코끼리가 크게 놀라 한 번 그 코를 휘두르매 범 두 마리는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코끼리가 범을 죽일 마음은 없었는데, 냄새 나는 것을 싫어하여 코를 휘두른다는 것이 잘못 맞았던 것이었다. 
康熙時, 南海子有二惡虎. 久而不能馴, 帝怒命驅虎, 納之象房. 象大恐, 一揮其鼻, 而兩虎立斃. 象非有意殺虎也, 惡生臭而揮鼻誤觸也.

아아! 세간의 사물 가운데 겨우 털끝같이 미세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늘을 일컫지 않음이 없으나, 하늘이 어찌 일찍이 일일이 이름을 지었겠는가? 형체를 가지고 ‘천天’이라 하고, 성정을 가지고는 ‘건乾’이라 하며, 주재함을 가지고는 ‘제帝’라 하고, 묘용妙用을 가지고서는 ‘신神’이라 하여, 그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이고 일컬어 말하는 것도 몹시 제멋대로이다. 이에 이기理氣로써 화로와 풀무로 삼고, 펼쳐 베품을 가지고 조물造物로 여기니, 이것은 하늘 보기를 교묘한 장인匠人으로 보아 망치질하고 끌질하며, 도끼질과 자귀질 하기를 잠시도 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噫! 世間事物之微, 僅若毫末, 莫非稱天, 天何嘗一一命之哉. 以形軆謂之天, 以性情謂之乾, 以主宰謂之帝, 以妙用謂之神, 號名多方, 稱謂太褻. 乃以理氣爲爐鞴, 播賦爲造物, 是視天爲巧工, 而椎鑿斧斤, 不少間歇也.

그런 까닭에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이 초매草昧, 즉 혼돈을 만들었다. 天造草昧”고 하였는데, 초매라는 것은 그 빛이 검고 그 모습은 흙비가 쏟아지는 듯 하여, 비유하자면 장차 새벽이 오려고는 하나 아직 새벽은 되지 않은 때에 사람과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캄캄하여 흙비 내리는 듯한 가운데에서 하늘이 만들었다는 것이 과연 어떤 물건인지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하겠다. 비유컨데 국수집에서 밀을 갈면 가늘고 굵고 곱고 거친 것이 뒤섞여 땅으로 흩어진다. 대저 멧돌의 공능은 도는데 있을 뿐이니, 애초부터 어찌 일찍이 곱고 거친 것에 뜻이 있었겠는가?
故易曰: “天造草昧”, 草昧者其色皂而其形也霾, 譬如將曉未曉之時, 人物莫辨, 吾未知天於皂霾之中所造者, 果何物也. 麵家磨麥, 細大精粗, 雜然撒地. 夫磨之功, 轉而已, 初何嘗有意於精粗哉? 

그런데도 말하는 자들은 “뿔이 있는 놈에게는 윗니를 주지 않는다”고 하여 마치 사물을 만듦에 모자란 것이라도 있는 듯이 하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감히 묻는다. 
“이빨을 준 것은 누구인가?” 
사람들은 장차 말하리라.
“하늘이 주었다.”
다시 묻는다. 
“하늘이 이빨을 준 것은 장차 이것으로 무엇을 하게 하려한 것인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리라. 
“하늘이 하여금 물건을 씹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묻는다. 
“이로 하여금 왜 물건을 씹게 하는가?”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대저 이치이다. 새나 짐승은 손이 없으므로, 반드시 부리나 주둥이로 숙여서 땅에 닿게하여 먹을 것을 구한다. 때문에 학의 다리가 높고 보니 목이 길지 않을 수 없는데, 그래도 혹 땅에 닿지 않을까 염려하여 또 그 부리를 길게 만든 것이다. 진실로 닭의 다리를 학처럼 만들었더라면 반드시 뜰 가운데서 굶어 죽었을 것이다.”
然而說者曰: “角者不與之齒.” 有若爲造物缺然者, 此妄也. 敢問: “齒與之者誰也?” 人將曰: “天與之.” 復問曰: “天之所以與齒者, 將以何爲?” 人將曰: “天使之齧物也.” 復問曰: “使之齧物, 何也?” 人將曰: “此夫理也. 禽獸之無手也, 必令嘴喙, 俛而至地以求食也. 故鶴脛旣高, 則不得不脛長, 然猶慮其或不至地, 則又長其嘴矣. 苟令鷄脚效鶴, 則餓死庭間. 

나는 크게 웃으며 말하리라.
“그대가 말하는 이치란 것은 소나 말, 닭이나 개에게나 해당할 뿐이다. 하늘이 이빨을 준 것이 반드시 고개를 숙여 물건을 씹게 하려는 것이라고 치자. 이제 대저 코끼리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어금니를 심어 주어 장차 땅으로 숙이려고 하면 어금니가 먼저 걸리게 되니, 이른바 물건을 씹는 것이 절로 방해되지 않겠는가?”
어떤 이는 말하리라. 
“코에 힘입음이 있을 따름이다.”
나는 말한다. 
“그 어금니를 길게 해 놓고 코에 힘입느니, 차라리 어금니를 뽑아 버리고서 코를 짧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제서야 말하던 자는 처음의 주장을 능히 굳게 지키지 못하고 배운 바를 조금 굽히게 되리라. 
余大笑曰: “子之所言理者, 乃牛馬鷄犬耳. 天與之齒者, 必令俛而齧物也. 今夫象也, 樹無用之牙, 將欲俛地, 牙已先距, 所謂齧物者, 不其自妨乎?” 或曰: “賴有鼻耳.” 余曰: “與其牙長而賴鼻, 無寧去牙而短鼻?” 於是乎, 說者不能堅守初說, 稍屈所學. 

이것은 마음으로 헤아림이 미치는 바가 오직 소나 말, 닭이나 개에만 있지, 용이나 봉황, 거북이나 기린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쳐서 이를 죽이고 마니 그 코는 천하에 무적이다. 그러나 쥐를 만나면 코를 둘 곳이 없어 하늘을 우러르며 서있는다. 그렇다고 해서 장차 쥐가 범보다 무섭다고 말한다면 앞서 말한 바의 이치는 아닐 것이다.
是情量所及, 惟在乎馬牛鷄犬, 而不及於龍鳳龜麟也. 象遇虎, 則鼻擊而斃之, 其鼻也, 天下無敵也. 遇鼠, 則置鼻無地, 仰天而立. 將謂鼠嚴於虎, 則非向所謂理也. 

대저 코끼리는 직접 눈으로 보는데도 그 이치를 알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은데, 또 하물며 천하 사물은 코끼리보다 만배나 됨에랴! 그런 까닭에 성인께서 《주역》을 지으실 적에 ‘상象’을 취하여 이를 드러내었던 것은 만물의 변화를 다하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夫象猶目見, 而其理之不可知者如此, 則又況天下之物, 萬倍於象者乎? 故聖人作易, 取象而著之者, 所以窮萬物之變也歟.


몇 해전 일이다. 강의 시간에 연암의 글을 강독하고서 평설을 써오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다. 한 학생이 과제 끝에 쓴 “장미는 예로부터 그 이름으로 존재해 왔으나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한 이름뿐”이라는 구절이 내 시선을 끌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인용한 대목이었다. 에코의 이 책에는 연암의 코끼리 이야기와 아주 비슷한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듣거라, 아드소. 수수께끼 풀이는, 만물의 근본되는 제 1원인으로부터 추론해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특수한 자료를 꾸역꾸역 모아 들이고 여기에서 일반 법칙을 도출하면 저절로 풀리는 것도 아니다.......뿔이 있는 짐승의 예를 들어 보자. 왜 짐승에게 뿔이 있겠느냐? 뿔이 있는 짐승에게는 윗니가 없다. 아직 모르고 있었다면 유념해 두어라. 그런데 윗니도 없고 뿔도 없는 짐승도 있으니 낙타가 바로 이런 짐승이다. 윗니가 없는 짐승에게는 위가 네 개라는 것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너는, 이빨이 없어서 제대로 씹을 수 없으니까 이런 짐승에게는 위가 네 개나 있어서 소화를 도모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너도 상상할 수 있고 추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뿔은 어떨까? 너도, 짐승의 머리에 뿔이 자라는 이유를 상상할 수 있을 게다. 머리에 골질조직骨質組織을 솟아나게 함으로써, 부족한 이빨의 수를 보충하는 모양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설명이 못된다. 낙타에게는 윗니가 없다. 윗니가 없으면 위가 네 개 있고, 뿔이 있어야 마땅한데, 위가 네 개인 것은 분명하지만 뿔은 없다. 따라서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야 한다. 방어 수단이 없는 짐승의 머리에만, 몸 속의 골질이 뿔로 자라난다. 그러나 낙타의 가죽은 몹시 두껍다. 따라서 낙타에게는 뿔이라고 하는 방어 수단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면 여기에는 어떤 원칙이 있을 수 있다고 해야겠느냐......자연 현상에서 하나의 법칙을 이끌어 내자면 우선 설명되지 않는 형상에 주의하면서,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갖가지 일반적인 법칙을 서로 연계시켜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뜻밖의 결과들이 특수한 상황에서 서로 관련되는 데서, 혹은 여러 법칙을 두루 싸잡는 하나의 실마리가 잡혀 나온다. 이 실마리를, 유사한 경우에 두루 적용시켜 보거나, 다음 발전 단계를 미루어 헤아려 보면, 마침내 자기 직관이 옳은 지 그른 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이윤기 옮김, 1992, 열린책들) 하권 483쪽)

연암이 우리에게 던지는 첫 번째 화두는 코끼리이다. 흥미롭게도 에코는 낙타라는 기호를 가지고 연암과 비슷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코끼리나 낙타라는 기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소나 말, 개나 돼지에만 익숙해진 눈에 코끼리나 낙타는 언뜻 이해할 수 없는 의미들로 가득차 있다. 위 에코의 인용은 혼란스런 기호들 속에서 ‘하나의 법칙’에 접근해 가는 인식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앞선 연암의 문답과는 주객의 자리가 바뀌어 있다. 앞서 연암의 글에서 ‘하늘의 이치’를 들먹이며 예외적 존재를 인정치 않으려다 연암에게 공박당하는 ‘설자說者’의 태도는 윌리엄 수도사에게서 보다 세련된 논리를 갖추고서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나는 여기서 동서양 사고의 한 차이를 읽는다. 
이제 연암의 글을 따라가며 읽어 보기로 한다. 소나 말, 닭이나 개만 보며 평생을 살아온 시골 사람이 코끼리를 난생 처음 보았다면 그 느낌은 어떠했을까? 사진으로도 보지 못했고, 그림으로도 보지 못하다가 어느날 문득 만리 타국의 동물원 우리 속을 어슬렁거리며 왔다갔다 하는 코끼리의 모습과 처음 마주 했을 때, 그 느낌은 어떠했을까? 연암은 그 느낌을 괴상하고 진기하고 거대하고 한마디로 어마어마한 그 무엇이라고 했다. 그저 걸어가는데도 마치 비바람이 지나가는 듯 하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엉뚱하게도 젊은 시절 금강산을 유람하러 갔다가 동해에서 일출을 맞이하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일출 직전 먼 바다 위로 둥굴둥글 집채 인양 수도 없이 서있던, 물고기인지 짐승인지도 분간이 안되던 신기루. 연암은 바로 열 걸음 앞에서 육중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코끼리가 마치 일출과 함께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던 헛깨비는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더라고 했다. 코끼리를 처음 상면한 충격은 이렇게 해서 일단 진정의 국면으로 들어선다. 
그 다음 단락은 코끼리의 외모에 대한 묘사이다. 코끼리를 한 번도 보지 못한 독자를 위해 누구나 알고 있는 사물에 견주어 코끼리의 각 부분을 친절하게 그려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관심은 쓸데 없이 긴 어금니, 자벌레 같고 굼벵이 같고 누에의 꽁무니 같고 족집게 같은 코로만 집중되어 있다. 
코로 물건을 집으니 그것이 주둥이인가 싶어 코는 어디 있는가고 묻는 이도 있다. 아예 그 긴 코를 다리 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덩치는 집채 만한게 눈은 쥐눈처럼 조그맣다. 그럴 리가. 워낙에 덩치가 크고 코와 어금니가 희한하다 보니, 그 위에 붙은 눈이 그만 작게 보인 것일 뿐이다. 
그 살살 웃는듯한 작은 눈에서 어진 성품을 읽어내던 연암은 대뜸 사나운 범 두 마리를 일격에 쓰러뜨리는 코끼리의 완력으로 화제를 돌린다. 사나워 길들이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의 난폭한 범이 코끼리가 휘두른 코 한방에 즉사해 버렸다고 하니, 다시금 독자들은 코끼리의 어마어마한 크기와 긴 코의 위력을 상상으로 그려볼밖에 도리가 없다. 더욱이 애초에 죽일려던 것도 아니고 냄새가 싫어 그저 허공에 대고 휘두른다는 것이 빗맞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천하의 그 많은 사물들은 누가 만들었는가? 하늘이 만들었는가? 연암은 사뭇 그럴 리가 없다는 투다. 천하 만물을 만들었다는 하늘도 이름이 여러 가지다. 생긴 모양을 본떠서는 ‘천天’이라 하고, 하늘은 굳건하기에 성정으로 말할 때는 ‘건乾’이라 한다. 하늘의 주재자는 누구인가? 그를 일러 사람들은 ‘제帝’라고 한다. 그 오묘한 섭리와 작용을 이를제면 ‘신神’으로 일컫는다. 한 가지 하늘을 두고도 이같이 많은 이름으로 부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조물주가 이기理氣로 결합하고 형상을 품부稟賦하였다 하여, 마치 하늘이 교묘한 공장工匠이 되어 일일이 망치질하고 끌질 하고 도끼질하고 자귀질하여 온갖 만물을 직접 만들기라도 한 듯이 여긴다. 
그러나 그런가? 《주역》에서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늘이 만든 것은 ‘초매草昧’ 즉 혼돈일 뿐이라고. 정작 하늘이 만들었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아직 갈려지지 않은 천지미판天地未判의 상태, 보다 생생하게 말하면 새벽이 오기 직전 아무 것도 구별할 수 없는 태초의 적막한 어둠 뿐이라고 《주역》은 적고 있다. 그렇다면 하늘이 만들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가? 돼지인가? 아니면 코끼리인가? 하늘이 만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하늘은 멧돌이 통밀을 갈아 때로 가늘게, 이따금 굵게, 곱고도 거칠게 땅으로 흩뿌려 놓듯, 그 날리는 가루 이상으로 헤아릴 길 없는 사물들을 이 세상 위로 제각금 흩어 놓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온갖 사물들 속에서 저 푸른 하늘을 주재하는 존재가 섭리하는 모종의 이치를 찾아내고자 한다. 거기서 그들이 찾아내는 진리란 대체로, ‘뿔이 있는 짐승은 윗니가 없다’거나, ‘날개가 있는 것은 다리가 두 개 뿐이다’와 같은 것들이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거나,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늘이지 마라’는 식이다. 그들은 또 닭의 다리가 학의 다리처럼 길지 않은데서 조물주의 오묘한 섭리를 발견하곤 쉽게 감동해 마지 않는다. 
그런데 코끼리는 이러한 일반적 규칙 어느 것으로 보더라도 맞지가 않으니 어찌할까? 코끼리의 어금니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코끼리는 왜 코가 저다지도 긴가? 어금니가 길기 때문에 걸리지 말라고 코가 긴 것일까? 그렇다면 차라리 어금니를 없애고 코를 짧게 해주는 것이 코끼리를 위하는 길이 아닐까? 조물주는 왜 코끼리에게 저런 장난을 쳤을까? 거기에 무슨 이유라도 있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내 눈으로 보아 아는 세계의 하찮은 지식을 가지고 세상의 온갖 진리를 꿰뚫으려 하는 노력은 코끼리 앞에 서면 무력해지고 만다. 코끼리만 예외로 해 놓고 그냥 넘어 갔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고민스럽다. 그 사나운 범 두 마리를 일격에 쓰러뜨린 코끼리의 그 코도 조막만한 새앙쥐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코끼리의 코 속으로 쥐가 들어가면 코끼리는 그만 미쳐 날뛰다 죽는다. 자! 사나운 범은 코끼리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그 용맹한 코끼리는 범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새앙쥐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그렇다면 새앙쥐는 범보다 위대한가? 이것을 수긍할 수 없다면, 대저 저 하늘의 일정한 섭리란 것은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
하늘의 섭리는 없다. 고정불변의 이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물은 제각금 살아 숨쉰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있다. 내가 알지 못한다 해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지 말아라. 지금 내 눈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저 코끼리야 말로 그 살아 있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천지만물의 주재자라고 믿는 하늘을 두고도 우리는 필요에 따라 천天·건乾·제帝·신神 등의 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가? 
같은 하늘이로되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지듯, 한 가지 사물 안에도 온갖 이치가 깃들어 있다. 나는 코끼리를 통해 세계와 만난다. 《주역》의 괘卦는 각각의 ‘상象’으로 형상화 된다. 그런데 그 괘상의 결합은 미묘하고도 복잡하여 일괄하여 말하기 어려운 무수한 ‘변상變象’들을 만들어 낸다. 이미지를 나타내는 ‘상象’이란 글자가 코끼리 상象자이기도 한 것은 무슨 심오한 관련이 있는가? 그것은 성인의 뜻이라 가늠할 수가 없다. 
연암은 예외를 인정치 않으려는 태도를 수긍하려 들지 않는다. 사실 ‘하늘의 이치’란 것도 ‘하나의 법칙’이란 것도 인간이 지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사물들은 살아 있다. 그것은 하나의 법칙으로 가둘 수가 없다. 하늘의 이름이 부르는 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지듯이, 사물의 질서는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하나의 기호는 하나의 진실만을 담고 있지 않다. 나는 그 기호를 통해 세상과 만난다. 기호와 기호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는 없다. 기호는 살아 있다. 코끼리는 살아 있다.
나는 이글을 쓰는 내내 연암의 〈상기〉를 에코가 읽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언제나 세상은 실체는 간데 없고 기호만이 괴력을 발휘해 왔다. 기호가 말씀이 되고 권력이 되어 살아 숨쉬는 사물의 생취生趣를 억압해 왔다. 기호와 세계 사이의 불균형과 간극은 영원히 메워질 수 없는 것인가? 
살펴본 대로 연암의 〈상기象記〉는 획일화된 가치 척도로 세계를 규정코자 하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거부의 뜻을 담아내고 있다. 우연히 열하 행궁에서 만난 코끼리를 앞에 두고, 인간의 사변적 지식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만고불변의 진리란 것이 어째서 이토록 허망한가를 그는 생각하고 있다. 
물상의 세계는 햇볕에 비친 까마귀의 날갯빛과도 같아 잡아 가두려고 하면 금세 달아나버린다. 이미지는 살아 있다. 내 손끝이나 눈길이 닿을 때마다 그것들은 경련한다. 살아있는 이미지들 속에서만이 삶의 정신은 빛을 발한다. 화석화된 이미지는 더 이상 이미지일 수가 없다. 이것이 코끼리를 앞에 세워 놓고 연암이 21세기의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다. 


1. 
이미지, 즉 상(象)은 하나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없다. 고인들이 본 적이 없던 코끼리를 보았을 때, 그 사람들이 알고 있던 사실들로 이리저리 꿰맞추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보다, 어떻게든 저것을 익숙하고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편해지고자 하는 꼼수다. 

살아숨쉬는 코끼리를 담을 수 있는 말 따위는 세상에 존재한 적도 없으며, 앞으로 존재할 일도 없다. 
"대저 멧돌의 공능은 도는데 있을 뿐이니, 애초부터 어찌 일찍이 곱고 거친 것에 뜻이 있었겠는가?"

연암의 일갈은 어리석은 마음이 멈춘 곳에서 왔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Posted by 청공(靑空)
생각2015. 6. 10. 18:09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 말도 위로를 준다. 우리 현대사에서 아프지 않은 청춘은 없었다. 내 할아버지 세대는 청춘기에 나라를 빼앗겼다. 아버지 세대는 일제의 징용 징병과 한국전쟁을 겪었다. 내 세대는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와 혹심한 노동 착취에 시달리면서 청춘을 보냈다. 어느 세대의 청년들도 망국과 전쟁과 독재에 대해 책임질 일을 한 적이 없었지만, 어떻게든 그 고통을 견디면서 의미 있고 존엄한 삶을 찾으려 분투했다.

오늘의 청년들 역시 자기 책임이 아닌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다. 평생이 하루라면 20대 청년의 인생 시계는 이제 겨우 오전 9시에 왔을 뿐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고 노력하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그러니 절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라.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면 아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위로의 힘은 거기까지다. 아버지가 아들의 아픔을 대신해줄 수는 없다. 아픔을 견디는 능력을 상속해줄 방법도 없다.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혀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아포리아, 2013, 55-56쪽)


출처: 유시민 홈페이지 '자유인의 서재' (http://www.usimin.net/?p=1)


아버지는 아들의 아픔을 대신해줄 수 없고, 아픔을 견디는 능력을 상속해줄 방법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고, 그 삶의 지평 위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운명자이다.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나 또한 걷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이자 용기이다. 
그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꿋꿋한 나무가 될 수 있음을 나는 안다. 
믿는다라는 말은 안다라는 말 앞에서 초라해진다. 
보일 것 같다와 보인다라는 말의 차이와 같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 서 있고, 내 인생의 주인은 여기 있으며, 그 주인이 살아야 하는 삶 또한 여기 펼쳐져 있다. 
그 앞에서 돌아감이란 이제 다시는 없으리라. 

Posted by 청공(靑空)
생각2015. 5. 21. 07:01

거기 울고 지친 아름다운 당신
잊지 말아요.

어둡고 캄캄한 밤길 너머
해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어요.

정신없이 지나가는 하루 동안
별들이 그대를 지켜보고 있고요.

그리고 우주보다 멀리 있어도
나는 그대를 항상 사랑한답니다.

그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앞으로 셀 수 없는 날이 지나도
언제나,

잊지 말아요.

해가 뜨고 별이 뜨면
그대 사랑받고 있음을.

Posted by 청공(靑空)
생각2015. 5. 10. 09:20

우연히 불후의 명곡을 보다가 마이클잭슨의 "Heal the World"를 들었어요. 
그 후로 계속 마이클잭슨의 노래를 찾으며 들으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네요. 

왜 흘렸는지는 모르겠어요. 여러가지 많은 생각이 들었고 깨달았는데, 
함께 나누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진부한 이야기일꺼에요. 그런데 언제나 진부한 그것에 다가갈 수는 없더라고요. 
네 이웃을 사랑해라.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해라(홍익인간), 지옥에 있는 중생들까지 모든 중생을 구원해라. 
어떤 생각인지 아는데 거기에 못 도달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나(Ego)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로만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죠. 
이 것도 진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어요. 누구나 뻔히 알고 있는 이야기니 말이죠. 

그런데 노래를 계속 듣다보니 You and for Me라는 가사가 가슴에 들어오더군요. 
저기에서 나보다 너(You)가 먼저죠. 다들 알아요. 하지만 다들 Me and for You인 삶을 살죠. 

그리고 마이클이 노래부르는 중간에 계속 I love You라고 해요. 
우리도 그렇게 얘기하죠. 하지만 대부분들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You love me? I love You 하는 삶을 살죠. 
자기 연인.. 아니 자기 연인한테도 그러지는 않을꺼에요. 기껏해야 자기 자식 정도겠죠. 
그렇더라 하더라도 종종 I love You, You love Me? 라는 꽁무니를 붙여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 당신도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다하는 마음을 사람인 이상 버리기가 힘들어요. 

그렇지만 진정한 사랑은 내가 없어져야 돼요. 

그래서 사람들이 진정한 마음을 가질 수 없고, 진정한 삶을 살 수가 없는거에요.
자기 자식에게만이라도 내가 없는 사랑을 항상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고, 
그 자식은 세상 누구보다 큰 선물을 받고 아름답게 자랄꺼에요. 

돈이나 물질같은 것보다 사랑이 더 큰 것임을 우리는 살면서 항상 느끼고 갈구하는 바이죠. 


사실 내가 있어서 두려움도 생겨요. 사랑과 내 존재 사이에 '나'라는 게 끼면 사랑이 사랑이 아니게 돼요. 
원함이죠. 욕망이에요. 나도 사랑받겠다는 욕망. 당연한 것 같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면 두려울 것이 없어요. 그리고 내가 줄 수 있는 것도 다 줄 수 있고요. 
많은 사람들에게는 사랑하게 되면 바보같이 다 퍼주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오해나, 
그러다가 나만 다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지요.  

이러한 생각은 물질을 마음보다 중요시하거나, 나라는 환상이 있기 때문이에요.
마음이 물질보다 중요한 사람에게는 물질은 도구일 뿐이죠. 예수님과 부처님같은 사람들도 그랬지만, 
가까운 예로 테레사 수녀나, 위에서 얘기한 마이클잭슨에게도 물질은 물질 그 자체로 의미가 없어요. 
이런 사람들에게는 물질은 물질 이상의 의미를 갖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답니다. 

물질에 진정한 마음을 담아서 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요. 
우리가 연인이나 가족에게 선물을 할 때만 해도, 마음을 담은 선물을 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모르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전하며 마음을 전하는 차원이란 쉽지 않죠. 

주면 내가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의 근저에는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봐요.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음으로써 행복해서 그것을 주기 싫다는 마음이나, 
그것을 줌으로써 상대방이 주는 반응에 행복해지고 싶은 것이겠죠. 
두 가지 경우 모두 외부조건에 자신의 행복의 가능성이 좌지우지될 수 있기 때문에 불완전해요. 

그래서 행복은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 없어요. 만족하게는 할 수 있을지라도. 
행복은 조건이 붙어요. 항상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만 행복할 수 있어요. 
'내'가 있는 상황에서만 말이죠. 

그러나 사랑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죠. 주는 것 그 자체, 사랑하는 것 그 자체에서 
만족과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어떤 것이 더 나은 삶인지 아주 쉬운 일이지만, 그렇게 살기란 쉽지 않죠.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겠죠. 

그러나 우리는 분명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해요. 
모든 것을 사랑하면 무엇도 해칠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이 행복한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이죠. 

하지만 한계는 언제나 있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지 않는 한, 그 사람들은 우리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우리는 사랑을 함으로써 완전해지고 행복해지는 반면, 
그들은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어쩌면 우리를 통해서 진정한 삶을 살 가능성을 얻을 수 있을꺼에요. 

달라이라마와 티벳이 제게는 그 사례가 될 것 같네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깊이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진정한 사랑을 얻어야 진실한 자유와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그 곳으로 가는 길은 사랑일수도, 깨달음일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내'가 없어지면 그곳에는 어떻게든 이른다는 것이겠죠. 


언제나 사랑을 하는 삶에 대해서 표현하자면 영어보다는 우리말이 낫겠다 싶어요. 
주어를 안 써도 어색하지가 않거든요. 

사랑합니다.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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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공(靑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