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2014. 6. 9. 01:13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공자께서 이르시길,

아는 이는 좋아하는 이만 못하고 좋아하는 이는 즐기는 이만 못하다.


독일의 저명한 두뇌학자 Gerald Hüther에 따르면 뇌는 근육이 아니라서 훈련을 많이 한다고 더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분이 좋고 재미가 있어야 뇌세포를 연결하는 신경망이 생성되어서 능력이 쌓이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논어의 맨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앎(배움)과 좋아함(기쁨), 그리고 즐거움이 논어의 심장인 것이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공자께서 이르시길,

배우고 이를 수시로 익힘은 기쁜 일이지 아니한가?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나를 모른다하여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한가?


위 구절을 도올의 해석을 통해 이해한다면..

진실된 기쁨을 얻고자 한다면

떄에 맞는 새로운 것을 배워, 이를 끊임없이 정진하며 실천하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나눔으로 큰 즐거움을 얻으며,

누가 뭐라해도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이야말로

군자... 즉, 중용(中庸)의 삶을 사는 이인 것이다.


여기서 중용이란 흔들림이 없이 일관되며, 

지극히 높은 도(道)라고 공자는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능히 얻지 못하나

배우고 실천하고 뜻을 나누며 스스로 비추는 길을 걷는다면, 

그 삶이 멀리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Posted by 청공(靑空)
일상2014. 6. 3. 22:05

뭔가 노력하고 해보려고 하면.. 꼭 안 좋은 버릇들이 밀물처럼 밀려와 내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 평소에 나를 바꾸기 위해 시도하는 일들도 어느샌가 유야무야되기 일쑤다. 지속적인 의지를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모든 과정을 나누고 또 나누면 그 곳에는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고 상념과 사건에 이끌려가는 자신이 있다. 자기 스스로를 돌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항상됨'이 없이 여러 번 노력하는 것으로는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바보처럼 단 한 가지 생각만을 들고, 단 한 순간도 자신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영혼을 잘 돌보고, 소홀함이 없이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 늘 내가 말하는 바로 그것들일세, 크리톤! 더 이상 새로울 건 아무 것도 없으이. 자네들이 자네들 자신을 돌본다면, 자네들이 뭘 하든, 자네들은 나를 위해서도 내 가족을 위해서도 그리고 또 자네들 자신을 위해서도 기쁠 일을 하게 될 걸세. 비록 자네들이 당장 다짐을 하지 않더라도 말일세. 하지만, 만약에 자네들이 자신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래서 마치 발자국을 따라 가듯, 방금 말한 대로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따라 살고자 하지 않는다면, 비록 자네들이 당장에 여러 번 그리고 단단히 다짐한다 할지라도, 아무 것도 잘 해낼 수가 없을 걸세.(Phaedo, 115a)"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께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갚게나, 소홀히 말고.(Phaedo, 11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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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청공(靑空)
서양철학2014. 5. 30. 21:24

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나는 방랑자이며 산을 오르는 자다. 나는 평지를 사랑하지 않으며, 오랫동안 한자리에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앞으로 내가 어떠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든, 그 무엇을 체험하게 되든, 거기에는 늘 방랑과 산을 오르는 일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체험하는 존재가 아닌가.

 

  내게 우연한 일들이 닥칠 수 있는 그런 때는 지나갔다. 이미 나 자신의 것이 아닌 그 어떤 일이 새삼 내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오직 되돌아옴이 있을 뿐. 나의 고유한 자기, 그리고 이 자기를 떠나 오랫동안 낯선 곳을 떠돌며 온갖 사물과 우연들 사이에 흩어져 있었던 것, 그것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고 만다.

 

  또 한 가지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이제 마지막 정상, 내게 그토록 오랫동안 유보되어온 것 앞에 서 있다. 아, 나의 더없이 험난한 길을 이제 올라야 한다! 아, 나의 더없이 고독한 방랑이 시작된 것이다.

 

  나와 같은 인간은 이러한 시간을 피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는 시간을, "이제 비로소 그대는 위대함으로 통하는 그대의 길을 간다! 정상과 심연, 그것은 이제 하나로 연결되었다!

 

  그대는 위대함으로 통하는 그대의 길을 간다. 지금까지 그대의 최후의 위험이라고 불리었던 것이 이제 그대의 최후의 피난처가 되었다!

 

  그대는 위대함으로 통하는 그대의 길은 간다. 몰래 그대의 뒤를 따라는 자는 그 누구도 없어야 한다! 그대의 발로써 그대가 걸어온 길을 지워버렸고, 그 길 위에는 '불가능'이라고 씌어 있다.

 

  이제 그대는 타고 오를 사다리가 없으므로, 자신의 머리를 타고 올라가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 어떻게 위로 올라갈 수 있겟는가?

 

  그대 자신의 머리를 타고, 그대 자신의 심장을 넘어 가라! 그대의 가장 부드러운 것도 이제 가장 준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아끼기만 하는 자는 결국 그렇게 너무 아끼다 병들고 만다. 그러니 준엄하게 되는 것을 칭송하라! 버터와 꿀이 넘쳐흐르는 땅을 나는 칭송하지 않는다!

 

  많은 것을 보려면 자기 자신을 놓아버릴 줄 알아야 한다. 산을 오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혹독함이 필요하다. 인식하는 자로서 눈에 보이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어떻게 만사에 있어서 겉으로 드러난 근거 이상의 것을 볼 수 있을 터인가!

 

  그러나, 아,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모든 사물의 바닥과 그 배경을 보려고 했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 자신을 넘어서 올라가야 한다. 위로, 더 위로, 그대의 별들이 그대의 발 아래 놓일 때까지!

 

  그렇다! 나 자신과 나의 별들마저도 저 아래 내려다보는 것, 나는 그것을 나의 정상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정상으로 내게 남겨진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산을 오르는 동안 자신에게 준엄한 잠언으로 이렇게 말하면서 마음을 달랬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의 상처가 깊었던 것이다. 이윽고 산등성이의 꼭대기에 올랐을 때였다. 보라, 그의 눈앞으로 또다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 꼭대기에서의 밤은 차갑고 맑았으며 별빛으로 환했다.

 

  내게 주어진 운명을 알고 있다, 라고 마침내 그가 비통하게 말했다. 좋다! 각오가 되었다. 이제 나의 마지막 고독이 시작되었다.

 

  아, 내 발밑의 이 검고 슬픈 바다여! 아, 이 둔중하고 음울한 불쾌감이여! 아, 운명과 바다여! 그대들에게로 이제 내려가야만 한다.

 

  나는 지금 나의 가장 높은 산 앞에서, 나의 멀고도 먼 방랑 앞에 서 있다. 그러므로 나는 우선 일찍이 내가 내려갔던 것보다 더 깊이 내려가야만 했다.

 

  내가 일찍이 내려갔던 것보다 더 깊이 고통 속으로, 고통의 검디검은 만조에 다다를 때까지! 나의 운명이 그렇게 원한다. 좋다! 각오가 되었다.

 

  가장 높은 산들은 어디서 오는가?, 라고 일찍이 나는 물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이 바다로부터 온다는 것을 배웠다. 그 증거는 산의 바위와 산 정상의 암벽에 씌어 있다. 가장 높은 것은 가장 깊은 것으로부터 나와서 그 높이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Posted by 청공(靑空)
생각2014. 5. 27. 12:16


옛 사람은 겨울을 세 가지 남는 여가라고 했지만, 나는 마땅히 여름으로 세 가지 나머지로 삼는
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밤의 나머지이고, 밤에 앉아 있는 것은 낮의 나머지이며, 낮에 잠자는
것은 인사人事에 응수하는 나머지이다. 옛 사람의 시에, “나는 여름 해가 긴 것을 사랑한다. 我
愛夏日長”이라 한 것은 참으로 거짓이 아니다. 

古人以冬爲三餘. 予謂, 當以夏爲三餘: 晨起者, 夜之餘; 夜坐者, 晝之餘; 午睡者, 應酬人事之餘. 故
人詩云 “我愛夏日長”, 洵不誣也. 《幽夢影》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 동우董遇는 좇아 배우던 자가 시간이 부족함을 괴로워 하자 이렇게 말했다.
‘마땅히 세 가지 나머지에 해야 할 것이다. 겨울은 한 해의 나머지이고, 비오는 날은 개인 날의
나머지이며, 밤은 한낮의 나머지이다.’ 글을 읽는 자는 마땅히 이를 새겨 둘 일이다. 

董遇見從學者苦渴無日, 遇曰: ‘當以三餘: 冬者歲之餘, 雨者晴之餘, 夜者日之餘.’ 讀書者當作此
觀. 《讀書十六觀補》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하지 말라. 책 읽을 여가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농사일에 힘 쏟아 바쁜 중
에도 책 읽을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겨울에 농사 일이 한가로워 지면 그때에 읽고, 날이 흐려 들
일을 나갈 수 없게 되면 그때 읽으며, 낮에는 나가 일하고 밤에는 등불을 밝혀 놓고 읽을 수가 있
다. 흐린 날과 겨울철에는 하루 종일 책만 읽을 수도 있으니, 책 읽을 시간이 없지 않고, 책 읽을
마음이 없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책을 읽는 데는 때를 가리고 장소를 가릴 것이 없다. 겨울은 겨울대로, 여름은 여름대
로 책 읽는 기쁨은 언제나 새롭다. 더운 해가 떠오르지 않은 여름 새벽, 한낮의 열기가 식은 여름
밤은 독서의 기쁨을 배로 늘여 준다. 여름 해는 길고, 겨울 해는 짧다. 여름 낮에 낮잠을 청하는
까닭은 새벽과 밤을 기다리는 까닭이다. 

마음이 길을 만들지요.
마음이 달아난 자리에 핑계가 들어섭니다.

Posted by 청공(靑空)
생각2014. 5. 26. 11:43

젊은 시절의 독서는 틈 사이로 달을 엿보는 것과 같고, 중년의 독서는 뜰 가운데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며, 노년의 독서는 누각 위에서 달 구경 하는 것과 같다. 모두 살아온 경력의 얕고 깊음
에 따라 얻는 바도 얕고 깊게 될 뿐이다. 

少年讀書, 如隙中窺月; 中年讀書, 如庭中望月; 老年讀書, 如臺上玩月. 皆以閱歷之淺深, 爲所得之淺
深耳. 《幽夢影》

젊은 날의 독서는 전체를 보지 못해 우물안 개구리가 하늘을 보는 것과 같다. 한정된 분야의 지식
을 필요한 만큼 배워 쓴다. 중년의 독서는 전체를 포괄하여 한데 아우르고자 한다. 다만 너무 넓
어 두서가 없고 방향도 없다. 욕심을 거둔 만년의 독서는 그저 마음에 맞음을 구할 뿐이니 나는 없
고 다만 책이 있을 뿐이다. 


공부하는 사람이 책을 읽는 것은 병약한 사람이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다. 원기가 점차 회복되면
그제서야 약효가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질이 조금씩 변화해야 비로소 독서한 보람이 드러
나게 된다. 

學人之讀書, 猶弱人之服藥也. 元氣漸復, 乃見藥力. 氣質漸變, 乃見書功. 《賴古堂尺牘三選結隣集》


책 읽는 보람은 금세 나타나는 법이 없다. 조급한 사람은 큰 이룸을 얻지 못하리라. 먼저 약을 거
르지 않고 성의로 먹어 잔약한 원기를 회복시켜야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한다. 부족한 사람에게 공
부를 하라고 들볶기 보다 그 완악頑惡한 기질을 다듬어 성정을 돌보게 함이 낫지 않겠는가?

Posted by 청공(靑空)